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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붉은 저녁노을이 호수에 스며든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다시 마스크를 쓰고 호숫가를 걷고 있다. 멋진 모자를 쓴 노신사가 검은색 가방에서 황금색이 번쩍이는 악기를 꺼내 조립하더니 석양을 배경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굵직한 중저음의 색소폰 소리가 잔잔한 물결 위로 퍼져 나가며 무심하게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이 악기가 저한테 살아갈 힘을 줘요.” 연주가 끝나고 이근성(63) 씨가 악기를 소중하게 감싸 안는다. 중학교 때 아버지의 카세트에서 나오는 색소폰 소리를 처음 듣고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언젠가는 저 악기를 연주하고 싶다는 열망을 키웠지만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잊고 지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건축업을 하던 그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시름을 잊기 위해 찾은 ..
자가격리 8일째다.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방과 화장실 거실 일부가 나에게 허락된 공간이다. ‘삼시세끼’ 받아먹으며 방구석을 서성이다 보면 어느덧 하루해가 저물고 몸과 마음이 지쳐간다. 답답한 마음에 촛불을 켜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들으며 108배를 시작한다. 피아노의 장엄한 선율이 흐르고 절 횟수가 늘면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물방울처럼 굵어진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흐르다가 방석 위에 떨어진다. 1악장 알레그로가 폭풍이 몰아치듯 끝나가면서 100배를 넘어섰다. 방 안의 열기는 더해가고 숨결은 거칠어졌다. 2악장 아다지오가 시작되면서 촛불을 끄고 바로 앉는다. 속삭이는 듯한 2악장을 듣고 있으면 과거로 아득히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다. 음표들 사이에 아름답게 흐르는 선율..
일상이 또 멈췄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텅 비었다. 거리는 한산하고 식당에도 시장에도 인적이 드물다. 생존의 위험 속에 사람들은 움츠러들었고 생계의 위협 속에 누군가는 거리로 나서야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600년 전통의 서울 남대문시장도 활기를 잃고 깊은 적막감 속에 빠져들었다. “하늘이 너무 무심해…….” 올해처럼 장사가 안된 것은 평생 처음이라며 리어카에서 과일주스를 팔고 있는 주재만(75) 씨가 한숨을 쉬고 있다. 무더위 속에 하루 종일 넉 잔밖에 못 팔았다며 신문지를 말아 남의 속도 모르고 날아드는 파리를 쫓고 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본전이라도 해볼까 해서 나왔다는 주 씨는 야채 그릇과 핫바, 과일주스 등 ..
장맛비가 그쳤다. 신기록도 갈아치운 긴 장마였다. 오랜만에 갠 하늘은 맑고 푸르고 또 습하다. 뜨거운 햇살 아래 수재민들은 무너진 보금자리를 복구하고 쓰러진 농작물을 일으켜 세우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연천 수해현장을 지나 임진강변을 달리다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붙잡는다. 허리에서 몸을 뒤틀어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 의연하다. 하늘의 뭉게구름과 함께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고요한 풍경의 정적을 깨운다. “아빠, 달고나 냄새가 나.” 앞서가던 민준(9)이가 뒤에서 오는 가족을 향해 소리친다. 아빠 박정호(43) 씨가 방아깨비를 잡고 있던 민준이 동생들 손을 잡고 민준에게 다가간다. ..
천천히 찾아오는 어둠은 부드럽다. 수직으로 뻗은 나무와 온갖 모양의 나뭇잎들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빛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다. 여름을 노래하던 새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산은 깊은 침묵에 젖어들었다. 지리산과 덕유산 두 거인 사이에 오롯이 자리한 금원산 ‘고요의 숲’에서 밤을 맞고 있다. 전기가 없는 깊은 산중 어둠 속으로 빛 하나가 찾아들었다. 10여 년간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홀로 명상의 터를 일군 서승원(53) 씨가 책을 읽기 위해 촛불을 켰다. 양초 1개와 작은 향초 2개가 어둠을 가르며 2평 남짓한 오두막을 밝힌다. 책상 위에는 노자의 도덕경이 놓여 있고 벽을 따라 놓인 선반엔 책이 수북하다. “빛이 없으면 많은 것이 보여요.” 서 씨는 고교 시절부터 지리산을 타며 침낭 속에서 별을 보고 ..
“냐아~옹 야옹.” 사뿐사뿐 돌다리 난간을 걷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까만색 망토를 두르고 흰 구두를 신은 듯한 매혹적인 자태에 행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스마트폰에 담기 바쁘다. 그 모습을 한 남자가 자전거에 걸터앉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우리 삼봉이가 산책을 좋아해요.” 청계천으로 반려묘와 산책을 나온 윤미식(43) 씨가 ‘삼봉아!’ 하고 부르자 고양이가 특유의 민첩함으로 윤 씨의 어깨 위로 사뿐 올라선다. 원래 한 몸인 것처럼 그 모습이 자연스럽다. 4년 전 버려진 냥이를 친구가 데려다 키워 새끼를 낳고 그중 한 마리가 윤 씨 곁에 오게 됐다. “이 아이를 만나기 전에 방황을 많이 했어요.” 크로스핏 트레이너인 윤 씨는 텅 빈 집에 오면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하루 ..
기린, 쥐, 강아지, 오리, 곰, …. 지루한 장마 틈에 하늘에 ‘동물의 왕국’이 펼쳐졌다. 바람이 부는 대로 뭉쳤다 사라지며 구름은 다양한 동물들을 만들며 잊고 있던 동심을 깨운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이 구름처럼 일순간 뭉쳤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동심으로 돌아간 이 순간 기자도, 아빠도, 그 누구도 아닌 난 밀림의 왕자.
구름이 낮게 내려앉았다.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맑고 시리다. 예년보다 길게 이어진 장마로 몸과 마음이 눅눅해지던 사람들이 공원으로 나왔다. 부드러운 햇살을 즐기며 느리게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표정은 안 보여도 눈가에 피어나는 미소는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아내와 호수공원 산책길에 나섰다. 잔잔한 물결이 일면서 호수에 드리워진 구름도 두둥실 떠다닌다. 물과 사랑에 빠진 애수교(愛水橋)에 서니 어른 팔뚝만 한 잉어들이 물 밖으로 입을 내밀며 반갑게 인사한다. 호수교 아래 바람이 상쾌하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 어디서 불어오는지’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 밑을 지나니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오렌지색을 품고 구름 사이로 황홀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하늘은 참..
바람이 분다. 기다렸다는 듯 수천 개의 바람개비가 일제히 돌아간다. 언덕에서 잠자던 거인 조각상들이 기지개를 켜고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바람개비 앞에서 셀카를 찍던 연인들은 수줍게 입맞춤을 한다. 평화의 바람이 부는 곳,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이다. 휠체어가 햇살에 반짝인다. 부인과 함께 외출 나온 이승민(78) 씨가 휠체어에 앉아 바람개비를 본다. 평생을 섬유업계에서 일하다 은퇴 후 텃밭을 가꾸며 알콩달콩 살아가던 중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날벼락 같은 일로 한동안 망연자실했지만, 부인의 지극정성 간호로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더 이상 해줄 게 없어 안타까워요.” 부인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 씨가 담요를 덮고 바람 부는 곳을 향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집 안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맞..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다. 화려한 곳에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스타도 있고 누군가를 대신해 온몸을 날리고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흙먼지를 툴툴 털고 일어서는 삶도 있다. 장마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날, 사극 세트장에서 밤샘 촬영 작업을 마치고 문경 단산에 오른 스턴트맨을 만났다. “제 몸속에 저를 지탱해주는 쇠붙이가 7개 있어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겁게 웃으며 박근석(47) 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어릴 적 청룽(成龍)이 출연한 영화에 반해 30여 년을 촬영 현장에서 ‘레디∼ 액션’에 몸을 던졌다. ‘괴물’ ‘쉬리’ ‘올드보이’ 등 수백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역 연기라 주목받지 못했지만 뜨거운 현장의 열기에 늘 행복했다. 몸에 상처가 늘어나면서 진통제로 버티는 날도 많아졌다. 험한 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