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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른 후 차분해진 도심에 풍경 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대형서점 앞 벤치에 한 노신사가 동상 옆에 같은 모습으로 앉아 책을 보고 있다. 그 모습에 반해 가던 길을 멈추고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아 기웃거려보니 노신사가 형광펜으로 책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공 중이다. “책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요.” 전직 공무원인 서춘근(69) 씨는 나이제한이 없는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수줍게 웃는다. 서점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면서 짬을 내 책을 보고 있는 중이다. 새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 난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서 씨의 모습이 6월의 신록처럼 싱그럽다. 촬영노트 아침, 저녁의 햇살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빛이 품고 있는 색온도가 분위기를 따..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삶의 순간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삶은 나아간다’ 장인喪중에 책 제목과 머릿말을 완성했습니다. 책을 만들면서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던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우리네 삶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재선충으로 고사된 소나무 숲에 조성된 강원 인제군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 하얀 수피에 검은 상처들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떨어뜨린 흔적들이다. 마포 임시선별검사소에서 만난 한진희 간호사 백 년의 미소로 행복의 비밀을 전해준 김순택 할머니. 산동네서 연탄배달 봉사하는 인채원 씨와 안경원 씨. 미사가 중단된 명동성당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루치아 자매님 연천 당포성으로 휴가나온 민준이네 가족. 꽃처럼 활짝 웃고 싶다는 취준생 함혜민 씨와 김은영 씨 ‘Mr. 남대문 콩글리시’ 남대문시장 노점상 주재만 씨. 희망의 빛’을 찾아 나선 1年 자작나무 숲을 걷습니다. 하얀 나무들이 아침 햇살에 눈 부십니다. 기지개를 켜고 긴 숨을 들이마시자 청량한 기운이 몸속 가득 스..

바람이 분다. 기다렸다는 듯 수천 개의 바람개비가 일제히 돌아간다. 언덕에서 잠자던 거인 조각상들이 기지개를 켜고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바람개비 앞에서 셀카를 찍던 연인들은 수줍게 입맞춤을 한다. 평화의 바람이 부는 곳,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이다. 휠체어가 햇살에 반짝인다. 부인과 함께 외출 나온 이승민(78) 씨가 휠체어에 앉아 바람개비를 본다. 평생을 섬유업계에서 일하다 은퇴 후 텃밭을 가꾸며 알콩달콩 살아가던 중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날벼락 같은 일로 한동안 망연자실했지만, 부인의 지극정성 간호로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더 이상 해줄 게 없어 안타까워요.” 부인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 씨가 담요를 덮고 바람 부는 곳을 향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집 안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맞..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다. 화려한 곳에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스타도 있고 누군가를 대신해 온몸을 날리고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흙먼지를 툴툴 털고 일어서는 삶도 있다. 장마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날, 사극 세트장에서 밤샘 촬영 작업을 마치고 문경 단산에 오른 스턴트맨을 만났다. “제 몸속에 저를 지탱해주는 쇠붙이가 7개 있어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겁게 웃으며 박근석(47) 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어릴 적 청룽(成龍)이 출연한 영화에 반해 30여 년을 촬영 현장에서 ‘레디∼ 액션’에 몸을 던졌다. ‘괴물’ ‘쉬리’ ‘올드보이’ 등 수백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역 연기라 주목받지 못했지만 뜨거운 현장의 열기에 늘 행복했다. 몸에 상처가 늘어나면서 진통제로 버티는 날도 많아졌다. 험한 대역..

‘탕탕탕’ ‘지잉∼칙’ 용접 불꽃이 사방으로 춤을 춘다. 코끼리만 한 프레스 기계가 굵은 쇠판을 무 자르듯 자른다. 녹슨 쇳가루들이 바람에 날리고 골목마다 쇠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옆 골목에선 젊은 예술가들이 쇠붙이를 이어붙이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철공소와 예술 공간이 공존하는 문래동의 모습이다. 지게차들이 분주히 물건을 싣고 내리는 가운데 판매를 위해 쌓은 쇠파이프가 눈길을 끈다. 큰 파이프 안에 작은 네모, 세모 파이프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모습이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고 있다. 가만히 보니 줄자, 래커, 계산기, 볼펜 등 온갖 작업도구가 구멍 안에 촘촘히 들어앉았다. 그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질서와 패턴이 마치 작은 우주를 보는 것 같다. “미적 감각이 탁월하시네요.” 파이프를 정리하고 있던 ..

“뻥이오~.” 시장 한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걸쭉한 소리에 왁자지껄하던 장터가 숨을 죽인다.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면 ‘펑’ 하는 대포 소리와 함께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오색 파라솔이 출렁인다. 취나물, 고사리 등을 가지고 나온 아낙들과 이것저것 구경하는 사람들로 모처럼 장터에 생기가 돈다. 경기 양평 5일장 풍경이다. “이영애가 여기 단골이여.” 구수한 향기와 함께 뻥튀기 장수의 자랑이 이어진다. “문주란도 자주 오는데 우리 ‘강냉이’를 아주 좋아해.” 그냥 웃자고 하는 ‘뻥’인 줄 알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거든다. 왕년의 스타들이 양수리 근처에 많이 살고 있어 이곳 오일장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것 같네.” 코로나19 여파로 열고 닫기를 반복하던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신바람이 난 ..

산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깃든 침묵 때문일 것이다. 늘 그랬듯이 지리산은 말없이 지친 마음을 보듬어 준다.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목인 경남 산청 중산리 산자락에 대숲이 눈에 들어온다. 한 줄기 바람이 대숲을 스치자 댓잎 쏠리는 소리가 청아하다. 눈을 감고 복잡한 일상들을 하나씩 바람에 날려 보낸다. 쏴아 하는 댓잎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감미로운 향기가 코끝에 스며든다. 찔레꽃 향이다. 그 향기를 따라가다 대숲 끝자락에서 찔레꽃을 따고 있는 전문희(58) 씨를 만났다. 차를 만들기 위해 꽃과 새순을 따고 있다. “찔레꽃 향기는 내 어머니 체취 같아요.” 찔레꽃이 필 때면 유독 어머니가 그리워진다는 전 씨는 하얗게 피어난 꽃을 보면 산자락 어디를 가도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는 것 같다고 한다. 그녀의 사..

‘끼기기깅∼.’ 힘겹게 산을 오른 선율이 계곡물 흐르듯 가슴속에 스며든다. 검은 코트를 입은 푸른 눈의 신사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관광객들로 북적였던 인사동 한복판 문화의 거리다. 활력을 잃은 거리에서 사람들은 무심하게 제 길을 가고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만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름은 샤샤, 우크라이나에서 왔다고 했다. 서로 영어가 서툴러 몇 가지만 묻고 눈인사를 나누며 헤어졌지만 수줍게 미소 짓던 그의 맑은 눈빛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 3개월 만에 찾은 인사동에서 그를 다시 보니 두툼했던 코트가 얇게 바뀐 것 외에는 처음 본 모습 그대로이다. 반갑기도 하고 혹시 고국에 못 갔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바이올린 선율은 여전히 내 마음..

사그락 사그락∼ 까칠까칠한 수염을 하늘로 치켜세운 청보리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로의 몸을 비벼댄다. 익어가는 보리밭 위로 화들짝 놀란 비둘기들이 푸드덕 날아가고 키다리 미루나무도 바람에 몸을 뒤척인다.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을 등지고 캠핑장 앞에 조성된 ‘난지 한강공원’의 청보리밭이다. “이맘때면 어머니 생각이 문득문득 나요.” 추억에 잠긴 듯 두 손으로 보리를 쓰다듬고 있던 윤모(69) 씨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난했지만 보리가 영그는 이맘때면 특히 먹을 것이 없었다. 보따리 채소장사를 하시는 어머니는 채소가 안 팔리는 날에는 밤늦게 오셨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들면 늦은 밤에 오신 어머니는 꽁보리밥을 지어주셨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을 보면 자신의 어머니 같아 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