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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아빠다!” 엄마와 놀던 아기 비오리 두 마리가 쏜살같이 아빠에게 달려갑니다. 먹음직한 물고기를 입에 물고 가족에게 달려가는 아빠 비오리의 발놀림이 경쾌합니다. 어린 시절, 퇴근하시는 아버지께 인사를 하면서도 눈길은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꾸러미에 먼저 가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늘 기다림과 설렘의 존재였습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둥지를 떠났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퇴근길 제 손에는 봉지 하나 덩그러니 들려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 속 얼굴과 마주한다. 복잡한 일상과 삶 속에서 주름은 늘고 표정은 나날이 굳어간다. 100세 시대라는데 이대로 늙어 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은근히 걱정되던 중 오래전 TV에서 해맑게 웃던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났다. 수소문 끝에 올해 100살을 맞으신 김순택 할머니를 만나러 인천 옹진군 신도를 찾았다. 마을 이장님 안내로 과수원 한가운데 있는 집에 들어서자 햇살 아래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백발의 온화한 미소가 온 집 안을 환하게 밝히는 것 같다. 천천히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 할머니는 이장님의 만류에도 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서 저어 주신다. 주름진 손을 보니 백 번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을 보내며 모진 세월을 지냈을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할머..
아기 손 같은 신록들이 기지개를 켠다. 분홍색 앵초, 보랏빛 팥꽃나무, 노란 산괴불주머니가 저마다 자신의 색을 뽐내고 있다. 연못가에 동이나물이 노란 꽃을 피웠고 그 사이로 갓 깨어난 올챙이들이 꼬물꼬물 헤엄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된 봄의 절정에 경기 용인 한택식물원에서 만난 풍경이다.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지요.” 모란작약원에서 만난 이택주(80) 원장이 새로 돋아난 신록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반평생 식물원을 가꾸고 지켜온 그의 모습에는 할아버지 같은 자상함과 부드러움이 배어 있다. 경제 논리가 앞서던 1970년대 그는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우리 산, 우리 강의 작은 풀꽃들에 젊음과 열정을 바쳤다. ‘제대로 된’ 식물원을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국내 최..
“조심하세요. 어두우니 선글라스를 벗으세요.” 기차가 멈춘 폐철로를 따라 팔당호를 감싸고 돌아가는 한강나루길에 터널을 만났다. 스피커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기계음에 여유롭던 걸음이 머뭇거려진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서로를 껴안고 봄볕을 즐기던 산과 강이 일순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희미한 점멸등이 그 자리를 대신해 깜박이고 있다. 다시 겨울로 돌아간 듯 공기마저 차고 무겁다. 곡선으로 이어진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아 더 길게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는 다가오는 모든 것이 위협적이다. 언제 나타났는지 헬멧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자전거 행렬이 어둠을 가르며 순식간에 사라진다. 온몸이 긴장되고 마음마저 움츠러든다. 하루하루를 불안과 초조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삶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
‘딸랑 딸랑 딸랑.’ 맑고 시린 풍경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진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독경 소리에 맞춰 연등들이 춤을 춘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도심 속 사찰 길상사를 찾았다. 네 마리의 암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길상7층보탑 주변을 돌며 지친 마음을 다독이다 문득 잊고 지내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만인간 다 편하고 다 평화로워, 화목을 이루면 우리 자식들에게 좋겠죠. 자식들 공만 안 드립니다. 우리나라가 편해야 돼요. 한 몸 한뜻으로 모두 편하게 해주십쇼.” 마치 랩을 하듯이 중얼거리며 기도를 하신 할머니는 앞치마에 고이 가져온 방울토마토 몇 알을 돌탑 위에 올려놓으셨다. “정성이 부족해서 우짠디요, 더 사갖고 올 것인디 이렇게 왔네요.” 햇살이 곱던 그날, 두륜산 만일지암 오층석탑 앞에서 기도를..
왁자지껄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을 교실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다. 나란히 놓인 책상들이 기약 없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고 창문 밖에서 기웃거리던 개나리, 벚꽃들도 심심해졌는지 햇볕 가림막에 꼭꼭 숨어버렸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수업 중인 선생님만 홀로 분주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만든 새 학기 교실 풍경이다. “Hi, what are you doing?” 선생님이 학생들 출석을 부른 후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채팅창에 다양한 학생들의 반응이 올라온다. ‘선생님 어떻게 하죠, 전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한 학생의 메시지에 서둘러 답장을 보낸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선생님이 잘하게 해줄게….’ 경기 의정부 경민여중에서 1학년 영어를 담당하는 김혜연 선생님은 연달아 채팅창에..
“이랴∼ 이랴∼ 이랴∼” 정겨운 소리가 고요한 첩첩산중에 메아리친다. 비탈밭에서 소의 고삐를 밀고 당기며 쟁기질하는 농부의 손놀림이 능숙하다. 소는 늙은 농부의 호령에 뚜벅뚜벅 장단을 잘도 맞춘다. 경사진 밭에서 한 몸처럼 움직이는 농부와 소를 자세히 보니 소가 농부의 말을 척척 알아듣는다. “이랴∼” 하면 가고, “워” 하면 멈춰 선다. 고랑 끝에서 “워워∼” 하니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두 고랑을 갈고 나니 소도 농부도 거친 숨을 몰아쉰다. “이 밭이 6천 평이래요∼, 소 없으면 일을 못 해요.” 고삐를 내려놓고 자신의 고달픈 삶을 막걸리 한잔에 풀어내는 우광국(79) 어르신은 평생 소와 더불어 살아왔다. 저 소도 일을 시키기 위해 어미젖을 떼고 4개월 때부터 나뭇등걸을 씌워 길들였다고 한다. 어릴 때..
‘드르륵, 드르륵’ 어른 키보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재봉틀 박음질 소리가 요란하다. 선반에 수북이 쌓인 천 조각들이 빠른 손놀림에 낡은 재봉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스크를 구하려고 몇 시간씩 줄서 있는 모습이 마음 아팠어요.” 22년째 강화경찰서 옆에서 양장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애자(59)씨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스크를 만들어보았다. 우선 식구들을 주고 양장점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나눠줬다. 반응이 무척 좋았다. 때마침 마스크제작 자원봉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본격적으로 마스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강화군 자원봉사센터에서 재료와 샘플을 갖다 주면 한 땀 한 땀 마스크를 만들어 필요한 이웃에게 전해주고 있다. 16만1803명.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1월 ..
살몃, 살몃 가만히 들여다보니, 도토리 싹이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두근, 두근, 가만히 귀 귀울여보니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용케 다람쥐나 사람의 손을 피해 겨우내 낙엽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난 녀석입니다. 시련이 우리를 성장시키듯 어린 도토리도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자라겠지요. 장차 숲의 새 주인이 될 어린 도토리가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튼튼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며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덕구야, 날이 찬데 어디 쏘댕니다 왔어“ “…….” “어쿠야, 몸 젖은 거 봐라, 눈밭을 뒹굴다 왔구나야“ “…….” “고뿔 걸리면 약도 없슨게, 어여 이리와 몸 좀 노게“ “…….” 강원도에서 산이 깊어 가장 봄이 늦게 찾아온다는 정선군 남면 광덕리. 봄이 오는 길목에 겨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산이 높아 앞산과 뒷산을 이어 빨래 줄을 건다는 두메산골 외딴 농가에 정겨운 풍경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가마솥에 불을 지피시던 할머니는 천방지축 눈밭에서 뛰놀던 덕구를 불 가까이 오게 합니다. 할머니의 말에 아무 말 없는 덕구지만 따듯한 시선과 손길에 숨결이 부드러워집니다. 아름다움은 모두 과거에 존재한다고 하지요. 덕구와 할머니의 평화로운 모습에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년의 기억이 미소 지으며 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