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코로나 (10)
빛으로 그린 세상

밤 10시, 서울 을지로 한복판.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자 신세계가 펼쳐진다. 코로나 시대 같았더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풍경이다. 얼굴 마주 보며 먹는 음식, 술 한 잔…. 너무도 당연했던 일상들이 새삼 감동으로 와 닿는다. 아버지 세대들이 고단한 하루의 삶을 풀어냈던 그 자리를 지금은 스마트폰 세대들이 대신하고 있다. 잔과 잔이 부딪치며 웃음소리가 커져 간다. 누군가 건배제안을 하면 다 같이 잔을 부딪치며 합창이라도 할 것 같다. 어느덧 나도, 이 후끈한 분위기 속에 스며들어 근심 잊고 시원한 생맥주 사이를 유영하는 한 마리 노가리가 되었다. ■ 촬영노트 일명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1970년대 주머니 가벼운 인쇄노동자, 건축자재 공구상들의 하루 피로를 달래 줬던 곳이었다, 당시 맥주 500㏄에 ..

미세먼지 끝자락에 찾아든 노을이 반갑다. 마스크를 끼고 뛰어가는 중년에게도 서로만을 바라보던 청춘에게도 붉은 기운이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스며든다. 노을과 함께 찾아든 땅거미에 나무도 사람도 자신의 빛을 내려놓는다. 하루 종일 미세먼지처럼 붙어 다니던 근심, 걱정 황홀한 빛에 빨려 들어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코로나로 지친 마음, 노을이 전하는 위로에 가족들에게 사진과 함께 격려문자 한 통 건네 본다. “오늘도 수고했어!” ■ 촬영노트 길을 가다 예쁜 노을을 보면 행복하다. 눈길, 발길은 물론 마음마저 붙잡는다. 코로나19 확산과 미세먼지로 공원마저 발길이 뜸한 저녁. 신도시를 품고 있는 호숫가를 산책하다 아름다운 노을을 만났다. 행운이다.

오늘 아침 아내가 보내준 한 장의 사진에 하루 종일 가슴이 먹먹합니다. 아내는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항암치료와 연명치료를 거부한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 마다 아내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코로나로 외국에서 발만동동 구르고 있는 자식들에게 화상통화를 연결해주기도 합니다. 퇴원하면 아껴둔 술을 하자고 호기롭게 말씀 하셨는데……. 늘 묵묵하셨지만 따뜻하셨던 분입니다. 아내의 손을 통해 장인어른의 온기가 전해집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함박눈이 내린다. 산과 들 그리고 꽁꽁 언 강물 위로 소복이 내려앉는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산하가 어느새 순백의 세상이 됐다. 눈발을 헤치며 누렁이가 앞서가고 지게를 멘 주인이 뒤를 따라 다리를 건너고 있다. 그 정겨운 모습에 왠지 모를 그리움이 일렁인다. 강원 영월군 평창강 판운리 섶다리 풍경이다. “내 별명이 지게 도사야. 하하하.” 설을 앞두고 다리 건너 이웃 마을에 다녀온다는 하창옥(74) 씨가 불콰해진 얼굴로 호탕하게 웃는다. 발채를 얹은 지게 위에는 짐이 가득하다. 젊을 때 지게질깨나 했다며 지금도 일을 할 때 지게가 요긴하단다. 신작로가 뚫리고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지만, 강 건너 이웃 마을에 갈 때면 이 다리가 제격이다. 강 건너 이웃집에서 약주 한잔 걸치고 산이(풍산개)와 함께 집으로 ..

북극발 최강 한파가 물러갔지만 냉기가 거리 곳곳을 배회하고 있다. 나란히 늘어선 하얀 천막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접수를 하고 체온을 재고 마지막 천막 앞에 선 사람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하다.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 앞에서 코와 입을 벌리고 검체를 채취한 후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우려 때문인지 무거운 표정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긴다. 코로나19 방역 최전선인 마포구 서강대입구역 임시선별검사소 풍경이다.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아요.” 레벨D 방호복에 마스크하고 페이스 실드로 무장한 한진희(25) 간호사가 검체 채취를 마치고 천막 밖으로 나오고 있다. 진희 씨는 신규 간호사로 병원 웨이팅 중 작년 9월부터 코로나 최전선에 투입됐다. 사회초년생으로 처음에는 방역의 최전선에 서는 일이 무섭고 긴장도..

삶의 에너지가 바닥날 때면 회사에서 가까운 남대문시장을 찾는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의욕이 조금씩 생겨난다. 특히 시장 한가운데 있는 꽃상가는 늘 그윽한 향기로 나를 반겨준다. 그리고 이곳을 나설 때는 꽃 한 다발과 함께 미소가 배어나곤 했다. 코로나로 꽃시장이 급속하게 얼어붙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골 꽃집 아주머니가 계시는 남대문 꽃상가를 찾았다. “얘는 어떻게 해요?” “걔들 참 예쁘지요.” 수북이 쌓인 꽃들을 앞에 두고 꽃집 아주머니가 모처럼 찾은 손님과 나누는 대화가 정겹다. 마치 어린아이들 보듯이 사랑스러운 눈빛이다. 30년 넘게 이곳에서 꽃도매를 하는 최명숙(69) 씨다. 코로나로 졸업과 입학 시즌마저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다행히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

꽁꽁 언 논바닥에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썰매에 태워 빙판을 달리고, 젊은 아빠는 아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얼음을 지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예약한 세 팀만 이용할 수 있지만, 만국기가 휘날리는 얼음판의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꽁꽁 싸맨 몸에선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마스크 밖으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경쾌하다. 경기 양평 강상초 앞 논썰매장 풍경이다. “삼시 세끼 아이들 밥 해먹인 보람이 있네요. 호호호.” 어린 두 딸이 밀어주는 썰매를 타고 엄마는 마냥 신이 났다. 작은 의자 두 개를 이어 만든 썰매에 앉은 이 순간 엄마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처음에는 엄마가 아이 둘을 태우고 열심히 밀어줬다. 그렇게 몇 바퀴 돌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려 엄마가 힘들어하자, 이..

돌돌 말려 있던 금계국 꽃봉오리가 찻잔 속에서 활짝 피어난다. 따뜻한 차 한 모금에 추위에 웅크렸던 몸이 살살 녹는 느낌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로 날아갈 듯 고개를 쳐든 작고 앙증맞은 솟대들이 작업실에 가득하다. 추위를 피해 전국의 새들이 여기에 다 모인 것만 같다. 웃음을 솟대에 실어 보내는 웃음치료사 송상소(60) 씨의 작업실이다. 방금 제작한 솟대를 보여주는 송 씨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가녀린 나뭇가지에 앉은 새 모양에 화사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5년 전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솟대에 마음이 끌려서 하나둘 만들어 보기 시작했었다. 그렇게 만든 솟대를 이웃에게 선물했더니 하나같이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때부터 솟대를 받는 이에게 항상 웃는 일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

텅 빈 해변에 구름만 가득하다. 드넓은 모래사장 너머로 바다와 맞닿은 하늘에 구름이 물결친다. 할매바위 앞 외로운 등대는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겨울 바다에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모든 모임은 취소됐고 어느 때보다 분주했을 송년의 거리는 적막하기만 하다. ‘감염’이라는 공포가 찬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면서 사람들은 더욱 움츠러들고 마스크 속으로 깊숙이 숨어들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내 기억 속에 일몰이 가장 아름다웠던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을 찾았다. “날씨도 코로나랑 같이 가는 것 같아요.” 코로나가 극성이니 하늘마저 우울해하는 것 같다며 문화관광해설사 홍경자(67) 씨가 인사를 건넨다. 관광객이 많이 와 가장 바쁘고 보람찰 때지만 올해는 그런 희망을 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됐을 때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