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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전하는 ‘아버지의 숨결’

빛으로 그린 세상 2020. 7. 28. 08:58

바람이 분다. 기다렸다는 듯 수천 개의 바람개비가 일제히 돌아간다.

언덕에서 잠자던 거인 조각상들이 기지개를 켜고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바람개비 앞에서 셀카를 찍던 연인들은 수줍게 입맞춤을 한다. 평화의 바람이 부는 곳,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이다.

휠체어가 햇살에 반짝인다. 부인과 함께 외출 나온 이승민(78) 씨가 휠체어에 앉아 바람개비를 본다.

평생을 섬유업계에서 일하다 은퇴 후 텃밭을 가꾸며 알콩달콩 살아가던 중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날벼락 같은 일로 한동안 망연자실했지만, 부인의 지극정성 간호로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더 이상 해줄 게 없어 안타까워요.”

부인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 씨가 담요를 덮고 바람 부는 곳을 향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집 안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맞는 바람이 살갑다.

햇살을 받으며 바람의 숨결을 음미하는 이 씨의 모습에서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겹쳐진다.

햇살과 바람을 좋아하셨던 분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

 


기적적으로 회복돼 50일 만에 바깥바람을 쐬러 나오셨다.

그때 휠체어에 앉아 중얼거리듯 하시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해님, 고맙습니다. 바람님, 고맙습니다.”

다시 바람이 분다. 비를 몰고 오는지 물비린내가 실려 있다. 이 씨 부부가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부인이 휠체어를 밀자 빨강·파랑·노랑 바람개비가 힘차게 돌아가며 이들을 배웅한다.

멀어져 가는 휠체어를 보고 있자니 바람 되어 찾아오신 아버지가 그립다. 가슴 깊이 묻어둔 그리움이 꿈틀거린다.

무심한 바람개비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신나게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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