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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오랫동안 새벽 출근을 하다 보니 아침밥을 거를 때가 많다. 일터로 허겁지겁 가는 대로변 가로수에 흰 눈이 소복이 내린 듯 새하얀 꽃들이 만개했다.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 꽃이다. 밤새 숙취와 허기로 배 속이 요란하다. 차는 막혀 꼼짝을 안 하고 멍하니 이팝나무 꽃을 바라보며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5월은 보릿고개가 절정이었다. 식구는 많았고 먹을 것은 귀했다. 허기는 늘 공기처럼 친근했고 흰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 꽃을 보기만 해도 배 속이 요란해졌다. 누군가에는 아름다운 꽃으로 누군가에는 아련한 추억 속으로 출근길 이팝나무 꽃이 수많은 사연을 안고 무성히도 피었다. ■ 촬영노트 요즘 전국을 흰 물결로 수놓은 나무가 이팝나무와 아까시나무다. 나무 꽃이 밥알(이밥)을 닮았다고 부른 이팝나무는 예로부터 꽃이 많..
어머니가 식탁에서 무언가에 열심이시다. 다가가 보니 당신이 좋아하는 꽃그림에 정성스레 색칠하고 계신다. 어머니의 손길을 받은 꽃들이 공책위에서 화사하게 피어난다. 밭일을 하시며 틈틈히 꽃가꾸기를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지난겨울 대퇴골을 크게 다쳐 걷기조차 힘에 부쳐하셨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한동안 힘드셨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신 어머니가 이제는 직접 심고 가꾸는 대신 그림으로 꽃을 키우신다. 색감이 곱고 아름답다. 그림을 배워 본적이 없지만 76세에 화가가 된 미국의 모지스 할머니 애기를 들려드리며 어머니도 화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아이고, 이 나이에 뭘 하겠니.” 수줍게 웃으시지만 싫지는 않으신 것 같다. 어머니는 오늘도 호미대신 색연필로 꽃을 가꾸고 계신다. 어머니가 호미대..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른 후 차분해진 도심에 풍경 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대형서점 앞 벤치에 한 노신사가 동상 옆에 같은 모습으로 앉아 책을 보고 있다. 그 모습에 반해 가던 길을 멈추고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아 기웃거려보니 노신사가 형광펜으로 책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공 중이다. “책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요.” 전직 공무원인 서춘근(69) 씨는 나이제한이 없는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수줍게 웃는다. 서점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면서 짬을 내 책을 보고 있는 중이다. 새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 난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서 씨의 모습이 6월의 신록처럼 싱그럽다. 촬영노트 아침, 저녁의 햇살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빛이 품고 있는 색온도가 분위기를 따..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삶의 순간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삶은 나아간다’ 장인喪중에 책 제목과 머릿말을 완성했습니다. 책을 만들면서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던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우리네 삶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가 주춤거리는 사이 공원산책을 나왔습니다. 목말랐던 대지가 촉촉하게 젖어듭니다. 재잘거리던 새들도 집으로 갔는지 북적이던 공원길이 고요합니다. 마스크를 벗고 심호흡을 하는데 문득 풍경 하나가 눈길을 붙잡습니다. 방울방울 맺혀있는 개망초 꽃잎 위에 알알이 보석들이 피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있노라니 메마른 내 마음에도 물기 가득 머금은 미소 꽃들이 피어납니다.
“아빠다!” 엄마와 놀던 아기 비오리 두 마리가 쏜살같이 아빠에게 달려갑니다. 먹음직한 물고기를 입에 물고 가족에게 달려가는 아빠 비오리의 발놀림이 경쾌합니다. 어린 시절, 퇴근하시는 아버지께 인사를 하면서도 눈길은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꾸러미에 먼저 가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늘 기다림과 설렘의 존재였습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둥지를 떠났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퇴근길 제 손에는 봉지 하나 덩그러니 들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