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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끝이 있기나 한걸까?” 출근길 버스 안에서 문득 차창 밖 노란빛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산수유가 꽃을 피웠다. 하루하루 안타깝고 숨 막히는 일상 속에 무심한 봄은 어느덧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서울에서 매화가 가장 먼저 핀다는 강남 봉은사를 찾았다. 사찰 입구부터 그윽한 향이 느껴진다. 마스크에 가려 잊고 지내던 아득한 향기다. 오랜 벗을 만난 듯 반갑다. “올해 손녀딸이 대학에 들어갔는데 아직 학교를 못가고 있어…….” 손녀에게 매화 사진 보내 준다는 백발의 노신사가 꽃들을 스마트 폰에 정성껏 담고 있다. “얼마나 설레고 기대가 컸겠어, 좀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 “ 올해 여든 한 살이 되었다는 황기인 어르신은 6.25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한다. “어제는 마누라..
오랜만에 명동성당을 찾은 그날, 한국 천주교 역사상 236년 만에 미사가 중단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종교 할동을 멈추지 않았던 곳이다. 개인 기도를 하는 신자들을 위해 성당 문은 열려있었다. 깊은 어둠이 성당 구석구석에 피어올랐다. 스테인드글라스 통해 들어온 한줄기 빛만이 적막을 감싸주고 있다. 어둠 속 곳곳에서 간절한 기도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검은 마스크를 쓰고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경건하다. 카메라를 갖고 있었지만 감히 그 순간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다. 무거운 침묵 속에 흐르는 성스런 아우라에 소름이 돋았다. "할 수 있는 것이 기도 밖에 없어요." "우리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너무 불쌍해요" 기도를 마치고 나서며 자신을 ‘루치아’ 라고 소개한 자매님의 눈가가 촉촉하다. ..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버들개지 형제입니다. 솜털에 쌓인 체 모진 겨울을 이겨낸 녀석들입니다. 남녘에서 불어오는 훈풍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분주해질 때 녀석들도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켭니다.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버들개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봄볕에 반짝이는 하트가 지치고 힘든 우리 마음을 다독이며 따듯하게 어루만져 주는 듯합니다.
멀리 능선 위로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이 순간만은 삼라만상이 숨을 죽이는 듯하다. 마침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솟아오르는 붉은 덩어리. 어둠과 추위를 헤치며 산등성에 올라선 사람들. 일제히 환호성과 함께 희망찬 마음으로 저마다의 새해 소망을 빌어본다. ‘새해에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화해와 발전을 이루는 한 해가 되게 하소서!’ 덕유산 향적봉
여든 어머니께서 담근 ‘자식 사랑’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저마다 월동 준비로 분주합니다. 우리 집도 김장이 끝나야 한 해를 갈무리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장을 그만하자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든을 넘긴 어머니는 홀로 배추를 심고, 가꾸고, 고집스럽게 김장을 이어가십니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지인들에게 김장을 나눠주고 보람을 맛보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니까요. 어머니, 잘 먹겠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연보랏빛으로 가을 들머리를 물들이던 벌개미취 꽃이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자식을 멀리 보내는 애끓는 부모마음 처럼 뽀얀 솜털씨앗을 잔뜩 움켜쥔 채 좀처럼 놓지 못합니다. 한차레 세찬 바람이 불자 더는 미련없이 씨앗을 훌훌 날려보냅니다. 솜털에 싸여 산으로, 들로 날아가는 여린 생명들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내년에 보랏빛으로 우리를 반길 것입니다. 희망이 품었기에 꽃은 활짝 피었을 때보다 새생명을 떠나 보낼 때 더 아름다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글 김선규기자
폭염에 아랑곳 않고 연잎 위에서 실잠자리 한 쌍이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가느다란 몸통을 구부려 서로의 마디를 파고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자연의 메시지를 실잠자리가 온몸으로 전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입추입니다.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 사랑으로 채우는 가을이길 기대해봅니다.
우연히 새둥지를 발견하고 살며시 다가서다 어미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 새도 놀라고 저도 놀랐습니다. 까만 두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알을 품고 있는 어미 새는 꼼짝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작고 여린 몸으로 세상을 향해 겁 없이 맞서는 당당하고 거룩한 모성(母性)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