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행복 (9)
빛으로 그린 세상

미세먼지 끝자락에 찾아든 노을이 반갑다. 마스크를 끼고 뛰어가는 중년에게도 서로만을 바라보던 청춘에게도 붉은 기운이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스며든다. 노을과 함께 찾아든 땅거미에 나무도 사람도 자신의 빛을 내려놓는다. 하루 종일 미세먼지처럼 붙어 다니던 근심, 걱정 황홀한 빛에 빨려 들어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코로나로 지친 마음, 노을이 전하는 위로에 가족들에게 사진과 함께 격려문자 한 통 건네 본다. “오늘도 수고했어!” ■ 촬영노트 길을 가다 예쁜 노을을 보면 행복하다. 눈길, 발길은 물론 마음마저 붙잡는다. 코로나19 확산과 미세먼지로 공원마저 발길이 뜸한 저녁. 신도시를 품고 있는 호숫가를 산책하다 아름다운 노을을 만났다. 행운이다.

키다리 나무들이 형형색색의 뜨개옷을 입고 있다. 찬바람이 불고 거리에는 낙엽이 뒹구는 쓸쓸한 계절이지만 가로수들이 알록달록 옷을 입고 있는 경기 과천시 문원동 도로는 나무들의 축제가 벌어진 듯하다. “너무 예뻐요.” 30년 경력의 야쿠르트 아줌마 이영옥(70) 씨가 이곳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며 환한 표정을 짓는다. 분홍색 옷을 입고 일하는 모습이 나무들이 입은 뜨개옷과 잘 어울린다. 나무들이 입고 있는 옷을 만져보니 한 코 한 코 정성껏 뜨개질한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작은 정성들이 연결돼 나무가 따뜻해지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훈훈해졌나 보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에 겨울나무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 촬영노트 뜨개질로 나무에 옷을 입히는 ‘트리니팅(trees knitti..

가는 여름이 아쉬웠나봅니다. 공원 주변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다람쥐가 ‘득템’한 아이스크림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인기척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과 눈을 맞추고 앙증맞은 혀를 내밀며 먹는 모습이 사뭇 진지합니다. 녀석의 꿀맛 같은 순간을 방해 할까봐 가만히 숨죽이며 바라봅니다. 새끼들 걱정, 도토리 모을 걱정……. 다람쥐라고 근심이 없을까마는 그래도 우연히 찾아든 행운을 즐기는 이 순간, 다람쥐는 행복해 보입니다. 녀석 입맛 변할까 괜한 걱정도 되지만 힘겨운 우리의 일상에도 문득 다가올 달달한 순간들을 그려보며 혼자 미소 짓습니다.

장맛비가 그쳤다. 신기록도 갈아치운 긴 장마였다. 오랜만에 갠 하늘은 맑고 푸르고 또 습하다. 뜨거운 햇살 아래 수재민들은 무너진 보금자리를 복구하고 쓰러진 농작물을 일으켜 세우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연천 수해현장을 지나 임진강변을 달리다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붙잡는다. 허리에서 몸을 뒤틀어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 의연하다. 하늘의 뭉게구름과 함께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고요한 풍경의 정적을 깨운다. “아빠, 달고나 냄새가 나.” 앞서가던 민준(9)이가 뒤에서 오는 가족을 향해 소리친다. 아빠 박정호(43) 씨가 방아깨비를 잡고 있던 민준이 동생들 손을 잡고 민준에게 다가간다. ..

구름이 낮게 내려앉았다.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맑고 시리다. 예년보다 길게 이어진 장마로 몸과 마음이 눅눅해지던 사람들이 공원으로 나왔다. 부드러운 햇살을 즐기며 느리게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표정은 안 보여도 눈가에 피어나는 미소는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아내와 호수공원 산책길에 나섰다. 잔잔한 물결이 일면서 호수에 드리워진 구름도 두둥실 떠다닌다. 물과 사랑에 빠진 애수교(愛水橋)에 서니 어른 팔뚝만 한 잉어들이 물 밖으로 입을 내밀며 반갑게 인사한다. 호수교 아래 바람이 상쾌하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 어디서 불어오는지’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 밑을 지나니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오렌지색을 품고 구름 사이로 황홀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하늘은 참..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가 주춤거리는 사이 공원산책을 나왔습니다. 목말랐던 대지가 촉촉하게 젖어듭니다. 재잘거리던 새들도 집으로 갔는지 북적이던 공원길이 고요합니다. 마스크를 벗고 심호흡을 하는데 문득 풍경 하나가 눈길을 붙잡습니다. 방울방울 맺혀있는 개망초 꽃잎 위에 알알이 보석들이 피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있노라니 메마른 내 마음에도 물기 가득 머금은 미소 꽃들이 피어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 속 얼굴과 마주한다. 복잡한 일상과 삶 속에서 주름은 늘고 표정은 나날이 굳어간다. 100세 시대라는데 이대로 늙어 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은근히 걱정되던 중 오래전 TV에서 해맑게 웃던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났다. 수소문 끝에 올해 100살을 맞으신 김순택 할머니를 만나러 인천 옹진군 신도를 찾았다. 마을 이장님 안내로 과수원 한가운데 있는 집에 들어서자 햇살 아래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백발의 온화한 미소가 온 집 안을 환하게 밝히는 것 같다. 천천히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 할머니는 이장님의 만류에도 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서 저어 주신다. 주름진 손을 보니 백 번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을 보내며 모진 세월을 지냈을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할머..

‘드르륵, 드르륵’ 어른 키보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재봉틀 박음질 소리가 요란하다. 선반에 수북이 쌓인 천 조각들이 빠른 손놀림에 낡은 재봉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스크를 구하려고 몇 시간씩 줄서 있는 모습이 마음 아팠어요.” 22년째 강화경찰서 옆에서 양장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애자(59)씨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스크를 만들어보았다. 우선 식구들을 주고 양장점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나눠줬다. 반응이 무척 좋았다. 때마침 마스크제작 자원봉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본격적으로 마스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강화군 자원봉사센터에서 재료와 샘플을 갖다 주면 한 땀 한 땀 마스크를 만들어 필요한 이웃에게 전해주고 있다. 16만1803명.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