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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장맛비가 그쳤다. 신기록도 갈아치운 긴 장마였다. 오랜만에 갠 하늘은 맑고 푸르고 또 습하다. 뜨거운 햇살 아래 수재민들은 무너진 보금자리를 복구하고 쓰러진 농작물을 일으켜 세우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연천 수해현장을 지나 임진강변을 달리다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붙잡는다. 허리에서 몸을 뒤틀어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 의연하다. 하늘의 뭉게구름과 함께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고요한 풍경의 정적을 깨운다. “아빠, 달고나 냄새가 나.” 앞서가던 민준(9)이가 뒤에서 오는 가족을 향해 소리친다. 아빠 박정호(43) 씨가 방아깨비를 잡고 있던 민준이 동생들 손을 잡고 민준에게 다가간다. ..

천천히 찾아오는 어둠은 부드럽다. 수직으로 뻗은 나무와 온갖 모양의 나뭇잎들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빛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다. 여름을 노래하던 새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산은 깊은 침묵에 젖어들었다. 지리산과 덕유산 두 거인 사이에 오롯이 자리한 금원산 ‘고요의 숲’에서 밤을 맞고 있다. 전기가 없는 깊은 산중 어둠 속으로 빛 하나가 찾아들었다. 10여 년간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홀로 명상의 터를 일군 서승원(53) 씨가 책을 읽기 위해 촛불을 켰다. 양초 1개와 작은 향초 2개가 어둠을 가르며 2평 남짓한 오두막을 밝힌다. 책상 위에는 노자의 도덕경이 놓여 있고 벽을 따라 놓인 선반엔 책이 수북하다. “빛이 없으면 많은 것이 보여요.” 서 씨는 고교 시절부터 지리산을 타며 침낭 속에서 별을 보고 ..

“냐아~옹 야옹.” 사뿐사뿐 돌다리 난간을 걷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까만색 망토를 두르고 흰 구두를 신은 듯한 매혹적인 자태에 행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스마트폰에 담기 바쁘다. 그 모습을 한 남자가 자전거에 걸터앉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우리 삼봉이가 산책을 좋아해요.” 청계천으로 반려묘와 산책을 나온 윤미식(43) 씨가 ‘삼봉아!’ 하고 부르자 고양이가 특유의 민첩함으로 윤 씨의 어깨 위로 사뿐 올라선다. 원래 한 몸인 것처럼 그 모습이 자연스럽다. 4년 전 버려진 냥이를 친구가 데려다 키워 새끼를 낳고 그중 한 마리가 윤 씨 곁에 오게 됐다. “이 아이를 만나기 전에 방황을 많이 했어요.” 크로스핏 트레이너인 윤 씨는 텅 빈 집에 오면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하루 ..

구름이 낮게 내려앉았다.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맑고 시리다. 예년보다 길게 이어진 장마로 몸과 마음이 눅눅해지던 사람들이 공원으로 나왔다. 부드러운 햇살을 즐기며 느리게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표정은 안 보여도 눈가에 피어나는 미소는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아내와 호수공원 산책길에 나섰다. 잔잔한 물결이 일면서 호수에 드리워진 구름도 두둥실 떠다닌다. 물과 사랑에 빠진 애수교(愛水橋)에 서니 어른 팔뚝만 한 잉어들이 물 밖으로 입을 내밀며 반갑게 인사한다. 호수교 아래 바람이 상쾌하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 어디서 불어오는지’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 밑을 지나니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오렌지색을 품고 구름 사이로 황홀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하늘은 참..

바람이 분다. 기다렸다는 듯 수천 개의 바람개비가 일제히 돌아간다. 언덕에서 잠자던 거인 조각상들이 기지개를 켜고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바람개비 앞에서 셀카를 찍던 연인들은 수줍게 입맞춤을 한다. 평화의 바람이 부는 곳,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이다. 휠체어가 햇살에 반짝인다. 부인과 함께 외출 나온 이승민(78) 씨가 휠체어에 앉아 바람개비를 본다. 평생을 섬유업계에서 일하다 은퇴 후 텃밭을 가꾸며 알콩달콩 살아가던 중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날벼락 같은 일로 한동안 망연자실했지만, 부인의 지극정성 간호로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더 이상 해줄 게 없어 안타까워요.” 부인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 씨가 담요를 덮고 바람 부는 곳을 향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집 안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맞..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다. 화려한 곳에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스타도 있고 누군가를 대신해 온몸을 날리고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흙먼지를 툴툴 털고 일어서는 삶도 있다. 장마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날, 사극 세트장에서 밤샘 촬영 작업을 마치고 문경 단산에 오른 스턴트맨을 만났다. “제 몸속에 저를 지탱해주는 쇠붙이가 7개 있어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겁게 웃으며 박근석(47) 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어릴 적 청룽(成龍)이 출연한 영화에 반해 30여 년을 촬영 현장에서 ‘레디∼ 액션’에 몸을 던졌다. ‘괴물’ ‘쉬리’ ‘올드보이’ 등 수백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역 연기라 주목받지 못했지만 뜨거운 현장의 열기에 늘 행복했다. 몸에 상처가 늘어나면서 진통제로 버티는 날도 많아졌다. 험한 대역..

수천, 수만 그루의 노란 해가 파도처럼 일렁인다. 7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황금빛 바다가 펼쳐졌다. 경쟁적으로 키재기 하는 어른 해바라기들 틈새로 어린 해바라기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잎들이 어깨동무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의 모습이 무질서한 것 같으면서도 조화롭다. 수많은 해바라기 틈 사이로 웃음꽃이 피었다. 동갑내기 함혜민(26) 씨와 김은영 씨가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도 이 해바라기들처럼 진짜 웃고 싶어요.” 농담처럼 말하는 은영 씨의 말에 뼈가 있다. 대학교 과동기인 두 사람은 지난해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이른바 취업준비생들이다. 그동안 네 차례 면접을 봤으나 코로나 감염병이 시작되면서 취업공고도 줄고 면접 볼 기회조차 좀처럼 오지 않는다며 사진을 ..

하나, 둘, 셋. 줄을 꼭 잡고 바람보다 더 빨리 달렸다. 이내 두 발이 허공에서 버둥거리더니 푸른 물결이 발아래 펼쳐진다. 잔뜩 긴장한 얼굴을 부드러운 바람이 어루만져 준다. 마침내 새처럼 날고 싶다는 꿈이 이뤄졌다. 문경새재가 한눈에 보이는 하늘 위를 날고 있는 것이다. 아찔했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산과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두대간 줄기인 조령산, 백화산, 월악산 등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저 멀리 한발 앞서 비행한 이철호(50) 씨의 모습도 보인다. 처음 하늘을 날아본다는 그도 나와 같은 심정이리라. 비행을 위해 활공장으로 올라오면서 많은 대화를 나눈 터였다. “세상이 이래 바뀌는구나 싶었지요.” 대구에서 삶의 기반을 잡은 이 씨는 그동안 겪었던 일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콧등에 땀이 솟아나고 숨이 차오른다. 억지로 잠을 청해 보지만 버스는 더디기만 하다. 대부분 눈을 감고 있거나 차창 밖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 숨 막히는 일상이 5개월째 되풀이되고 있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과연 끝이 있기나 한 걸까’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차에서 내려 잠깐 마스크를 벗고 숨을 몰아쉬자 ‘휘이’ 하는 휘파람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마치 오랜 잠수 끝에 물 위로 얼굴을 내민 해녀들의 숨비소리 같다. 한 번 더 긴 숨을 내쉬니 ‘하아~’ 소리와 함께 해녀 할머니 한 분이 해삼, 멍게가 가득 든 망사리를 짊어지고 내 기억 저편에서 걸어오신다. 제주 추자도 옆 작은 섬 횡간도의 고정심 할머니다. ‘휘호이~ 하아~’ 오랜 물질 끝에 물 밖으로 나와 숨을 몰아쉬는..

조심스레 발을 내디딘다. 신발에 갇혀 잠자고 있던 감각이 일제히 깨어나는 듯 온 신경이 발아래로 쏠린다. 물기를 머금은 황토가 반죽이 잘된 밀가루처럼 부드럽다. 서늘하고 미끄러운 감촉이 감싸자 발이 자유를 얻었다. 맨발이 더 자연스러운 대전의 계족산 황톳길이다. “아빠, 흙이 자꾸 방귀를 뀌어~” 재인(7)이가 형 재이(8)와 신나게 흙을 밟고 있다. 아이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황토가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오며 찌걱찌걱 소리를 낸다. 재인이는 이 소리가 흙이 방귀 뀌는 소리로 들렸나 보다. “맨 처음에는 엄청 간지러웠어요. 그런데 점점 좋아졌어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재이는 제법 의젓하게 흙 밟은 소감을 말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아직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는데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