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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이랴∼ 이랴∼ 이랴∼” 정겨운 소리가 고요한 첩첩산중에 메아리친다. 비탈밭에서 소의 고삐를 밀고 당기며 쟁기질하는 농부의 손놀림이 능숙하다. 소는 늙은 농부의 호령에 뚜벅뚜벅 장단을 잘도 맞춘다. 경사진 밭에서 한 몸처럼 움직이는 농부와 소를 자세히 보니 소가 농부의 말을 척척 알아듣는다. “이랴∼” 하면 가고, “워” 하면 멈춰 선다. 고랑 끝에서 “워워∼” 하니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두 고랑을 갈고 나니 소도 농부도 거친 숨을 몰아쉰다. “이 밭이 6천 평이래요∼, 소 없으면 일을 못 해요.” 고삐를 내려놓고 자신의 고달픈 삶을 막걸리 한잔에 풀어내는 우광국(79) 어르신은 평생 소와 더불어 살아왔다. 저 소도 일을 시키기 위해 어미젖을 떼고 4개월 때부터 나뭇등걸을 씌워 길들였다고 한다. 어릴 때..

‘드르륵, 드르륵’ 어른 키보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재봉틀 박음질 소리가 요란하다. 선반에 수북이 쌓인 천 조각들이 빠른 손놀림에 낡은 재봉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스크를 구하려고 몇 시간씩 줄서 있는 모습이 마음 아팠어요.” 22년째 강화경찰서 옆에서 양장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애자(59)씨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스크를 만들어보았다. 우선 식구들을 주고 양장점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나눠줬다. 반응이 무척 좋았다. 때마침 마스크제작 자원봉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본격적으로 마스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강화군 자원봉사센터에서 재료와 샘플을 갖다 주면 한 땀 한 땀 마스크를 만들어 필요한 이웃에게 전해주고 있다. 16만1803명.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1월 ..

“덕구야, 날이 찬데 어디 쏘댕니다 왔어“ “…….” “어쿠야, 몸 젖은 거 봐라, 눈밭을 뒹굴다 왔구나야“ “…….” “고뿔 걸리면 약도 없슨게, 어여 이리와 몸 좀 노게“ “…….” 강원도에서 산이 깊어 가장 봄이 늦게 찾아온다는 정선군 남면 광덕리. 봄이 오는 길목에 겨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산이 높아 앞산과 뒷산을 이어 빨래 줄을 건다는 두메산골 외딴 농가에 정겨운 풍경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가마솥에 불을 지피시던 할머니는 천방지축 눈밭에서 뛰놀던 덕구를 불 가까이 오게 합니다. 할머니의 말에 아무 말 없는 덕구지만 따듯한 시선과 손길에 숨결이 부드러워집니다. 아름다움은 모두 과거에 존재한다고 하지요. 덕구와 할머니의 평화로운 모습에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년의 기억이 미소 지으며 다가..

“끝이 있기나 한걸까?” 출근길 버스 안에서 문득 차창 밖 노란빛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산수유가 꽃을 피웠다. 하루하루 안타깝고 숨 막히는 일상 속에 무심한 봄은 어느덧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서울에서 매화가 가장 먼저 핀다는 강남 봉은사를 찾았다. 사찰 입구부터 그윽한 향이 느껴진다. 마스크에 가려 잊고 지내던 아득한 향기다. 오랜 벗을 만난 듯 반갑다. “올해 손녀딸이 대학에 들어갔는데 아직 학교를 못가고 있어…….” 손녀에게 매화 사진 보내 준다는 백발의 노신사가 꽃들을 스마트 폰에 정성껏 담고 있다. “얼마나 설레고 기대가 컸겠어, 좀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 “ 올해 여든 한 살이 되었다는 황기인 어르신은 6.25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한다. “어제는 마누라..

오랜만에 명동성당을 찾은 그날, 한국 천주교 역사상 236년 만에 미사가 중단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종교 할동을 멈추지 않았던 곳이다. 개인 기도를 하는 신자들을 위해 성당 문은 열려있었다. 깊은 어둠이 성당 구석구석에 피어올랐다. 스테인드글라스 통해 들어온 한줄기 빛만이 적막을 감싸주고 있다. 어둠 속 곳곳에서 간절한 기도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검은 마스크를 쓰고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경건하다. 카메라를 갖고 있었지만 감히 그 순간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다. 무거운 침묵 속에 흐르는 성스런 아우라에 소름이 돋았다. "할 수 있는 것이 기도 밖에 없어요." "우리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너무 불쌍해요" 기도를 마치고 나서며 자신을 ‘루치아’ 라고 소개한 자매님의 눈가가 촉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