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사람풍경 (55)
빛으로 그린 세상
‘탕탕탕’ ‘지잉∼칙’ 용접 불꽃이 사방으로 춤을 춘다. 코끼리만 한 프레스 기계가 굵은 쇠판을 무 자르듯 자른다. 녹슨 쇳가루들이 바람에 날리고 골목마다 쇠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옆 골목에선 젊은 예술가들이 쇠붙이를 이어붙이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철공소와 예술 공간이 공존하는 문래동의 모습이다. 지게차들이 분주히 물건을 싣고 내리는 가운데 판매를 위해 쌓은 쇠파이프가 눈길을 끈다. 큰 파이프 안에 작은 네모, 세모 파이프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모습이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고 있다. 가만히 보니 줄자, 래커, 계산기, 볼펜 등 온갖 작업도구가 구멍 안에 촘촘히 들어앉았다. 그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질서와 패턴이 마치 작은 우주를 보는 것 같다. “미적 감각이 탁월하시네요.” 파이프를 정리하고 있던 ..
“뻥이오~.” 시장 한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걸쭉한 소리에 왁자지껄하던 장터가 숨을 죽인다.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면 ‘펑’ 하는 대포 소리와 함께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오색 파라솔이 출렁인다. 취나물, 고사리 등을 가지고 나온 아낙들과 이것저것 구경하는 사람들로 모처럼 장터에 생기가 돈다. 경기 양평 5일장 풍경이다. “이영애가 여기 단골이여.” 구수한 향기와 함께 뻥튀기 장수의 자랑이 이어진다. “문주란도 자주 오는데 우리 ‘강냉이’를 아주 좋아해.” 그냥 웃자고 하는 ‘뻥’인 줄 알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거든다. 왕년의 스타들이 양수리 근처에 많이 살고 있어 이곳 오일장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것 같네.” 코로나19 여파로 열고 닫기를 반복하던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신바람이 난 ..
산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깃든 침묵 때문일 것이다. 늘 그랬듯이 지리산은 말없이 지친 마음을 보듬어 준다.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목인 경남 산청 중산리 산자락에 대숲이 눈에 들어온다. 한 줄기 바람이 대숲을 스치자 댓잎 쏠리는 소리가 청아하다. 눈을 감고 복잡한 일상들을 하나씩 바람에 날려 보낸다. 쏴아 하는 댓잎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감미로운 향기가 코끝에 스며든다. 찔레꽃 향이다. 그 향기를 따라가다 대숲 끝자락에서 찔레꽃을 따고 있는 전문희(58) 씨를 만났다. 차를 만들기 위해 꽃과 새순을 따고 있다. “찔레꽃 향기는 내 어머니 체취 같아요.” 찔레꽃이 필 때면 유독 어머니가 그리워진다는 전 씨는 하얗게 피어난 꽃을 보면 산자락 어디를 가도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는 것 같다고 한다. 그녀의 사..
‘끼기기깅∼.’ 힘겹게 산을 오른 선율이 계곡물 흐르듯 가슴속에 스며든다. 검은 코트를 입은 푸른 눈의 신사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관광객들로 북적였던 인사동 한복판 문화의 거리다. 활력을 잃은 거리에서 사람들은 무심하게 제 길을 가고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만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름은 샤샤, 우크라이나에서 왔다고 했다. 서로 영어가 서툴러 몇 가지만 묻고 눈인사를 나누며 헤어졌지만 수줍게 미소 짓던 그의 맑은 눈빛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 3개월 만에 찾은 인사동에서 그를 다시 보니 두툼했던 코트가 얇게 바뀐 것 외에는 처음 본 모습 그대로이다. 반갑기도 하고 혹시 고국에 못 갔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바이올린 선율은 여전히 내 마음..
사그락 사그락∼ 까칠까칠한 수염을 하늘로 치켜세운 청보리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로의 몸을 비벼댄다. 익어가는 보리밭 위로 화들짝 놀란 비둘기들이 푸드덕 날아가고 키다리 미루나무도 바람에 몸을 뒤척인다.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을 등지고 캠핑장 앞에 조성된 ‘난지 한강공원’의 청보리밭이다. “이맘때면 어머니 생각이 문득문득 나요.” 추억에 잠긴 듯 두 손으로 보리를 쓰다듬고 있던 윤모(69) 씨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난했지만 보리가 영그는 이맘때면 특히 먹을 것이 없었다. 보따리 채소장사를 하시는 어머니는 채소가 안 팔리는 날에는 밤늦게 오셨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들면 늦은 밤에 오신 어머니는 꽁보리밥을 지어주셨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을 보면 자신의 어머니 같아 집에 ..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 속 얼굴과 마주한다. 복잡한 일상과 삶 속에서 주름은 늘고 표정은 나날이 굳어간다. 100세 시대라는데 이대로 늙어 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은근히 걱정되던 중 오래전 TV에서 해맑게 웃던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났다. 수소문 끝에 올해 100살을 맞으신 김순택 할머니를 만나러 인천 옹진군 신도를 찾았다. 마을 이장님 안내로 과수원 한가운데 있는 집에 들어서자 햇살 아래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백발의 온화한 미소가 온 집 안을 환하게 밝히는 것 같다. 천천히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 할머니는 이장님의 만류에도 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서 저어 주신다. 주름진 손을 보니 백 번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을 보내며 모진 세월을 지냈을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할머..
아기 손 같은 신록들이 기지개를 켠다. 분홍색 앵초, 보랏빛 팥꽃나무, 노란 산괴불주머니가 저마다 자신의 색을 뽐내고 있다. 연못가에 동이나물이 노란 꽃을 피웠고 그 사이로 갓 깨어난 올챙이들이 꼬물꼬물 헤엄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된 봄의 절정에 경기 용인 한택식물원에서 만난 풍경이다.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지요.” 모란작약원에서 만난 이택주(80) 원장이 새로 돋아난 신록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반평생 식물원을 가꾸고 지켜온 그의 모습에는 할아버지 같은 자상함과 부드러움이 배어 있다. 경제 논리가 앞서던 1970년대 그는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우리 산, 우리 강의 작은 풀꽃들에 젊음과 열정을 바쳤다. ‘제대로 된’ 식물원을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국내 최..
“조심하세요. 어두우니 선글라스를 벗으세요.” 기차가 멈춘 폐철로를 따라 팔당호를 감싸고 돌아가는 한강나루길에 터널을 만났다. 스피커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기계음에 여유롭던 걸음이 머뭇거려진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서로를 껴안고 봄볕을 즐기던 산과 강이 일순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희미한 점멸등이 그 자리를 대신해 깜박이고 있다. 다시 겨울로 돌아간 듯 공기마저 차고 무겁다. 곡선으로 이어진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아 더 길게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는 다가오는 모든 것이 위협적이다. 언제 나타났는지 헬멧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자전거 행렬이 어둠을 가르며 순식간에 사라진다. 온몸이 긴장되고 마음마저 움츠러든다. 하루하루를 불안과 초조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삶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
‘딸랑 딸랑 딸랑.’ 맑고 시린 풍경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진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독경 소리에 맞춰 연등들이 춤을 춘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도심 속 사찰 길상사를 찾았다. 네 마리의 암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길상7층보탑 주변을 돌며 지친 마음을 다독이다 문득 잊고 지내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만인간 다 편하고 다 평화로워, 화목을 이루면 우리 자식들에게 좋겠죠. 자식들 공만 안 드립니다. 우리나라가 편해야 돼요. 한 몸 한뜻으로 모두 편하게 해주십쇼.” 마치 랩을 하듯이 중얼거리며 기도를 하신 할머니는 앞치마에 고이 가져온 방울토마토 몇 알을 돌탑 위에 올려놓으셨다. “정성이 부족해서 우짠디요, 더 사갖고 올 것인디 이렇게 왔네요.” 햇살이 곱던 그날, 두륜산 만일지암 오층석탑 앞에서 기도를..
왁자지껄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을 교실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다. 나란히 놓인 책상들이 기약 없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고 창문 밖에서 기웃거리던 개나리, 벚꽃들도 심심해졌는지 햇볕 가림막에 꼭꼭 숨어버렸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수업 중인 선생님만 홀로 분주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만든 새 학기 교실 풍경이다. “Hi, what are you doing?” 선생님이 학생들 출석을 부른 후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채팅창에 다양한 학생들의 반응이 올라온다. ‘선생님 어떻게 하죠, 전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한 학생의 메시지에 서둘러 답장을 보낸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선생님이 잘하게 해줄게….’ 경기 의정부 경민여중에서 1학년 영어를 담당하는 김혜연 선생님은 연달아 채팅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