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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가을 들녘을 걸어갑니다. 누렇게 영글어가는 벼 이삭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 옵니다. 논배미 옆 사과밭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빨간 등을 켜고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것 같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모진 가뭄과 무더위 그리고 태풍까지 저 열매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들뜬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어쩌면 우리네 삶도 저 사과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가면서 갑자기 닥친 시련을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단맛이 나고 무르익는 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삶의 에너지가 바닥날 때 전통시장은 좋은 에너지 충전소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새로운 삶의 의욕이 일곤 한다. 그중 꽃시장은 향기까지 덤으로 주니 일석이조다. 꽃장사 대목이라는 졸업식 시즌이라 남대문 꽃시장에 많은 사람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인적이 뚝 끊긴 채 향기로운 침묵만이 흐른다. “가장 바쁜 철인데 이러고 있네요. 작년만 해도 견딜 만했는데 올해는 너무 막막해요.” 30년 넘게 이곳에서 꽃과 사는 최명숙(70)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생기가 없다. 계속되는 코로나19 여파로 화훼농가는 하나둘 무너지고 졸업식 등 행사가 축소되거나 비대면으로 전환돼 어려움이 더하다고 한다. 꽃 한 다발 사 들고 나서는데 코끝이 찡하다. 매서운 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신문지에 싸인..
가마솥 폭염이 계속됩니다. 이더위에 어머니가 시골집에 가자고 성화십니다. 시골집에 도착하자 마자 우물에 연결된 호수로 화단에 물을 뿌리십니다. "애들 얼마나 목이 마르겠냐..." 어머니의 측은지심에 시들거리던 꽃들이 생기를 되찾는듯 합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호랑나비가 농염한 자태로 꽃들을 유혹합니다. 산에 잠시 다녀왔는데 땀이 비오듯 합니다. 대추나무 그늘에서 쉬던 정남이처럼 땡칠이가 됐습니다ㅋㅋ
삼복더위에 자벌레가 길을 나섰습니다. 거꾸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한껏 등을 굽혀 몸을 길게 늘이기를 반복하여 앞으로 나아갑니다. 힘겹게 여름을 나는 자벌레를 들여다보다 하루하루 숨쉬기조차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입니다. 언젠가는 번데기의 허물을 벗고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날겠지요. 시절인연을 기다리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자벌레가 삶의 스승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도 숲속의 수행자 자벌레는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여름 속을 가고 있습니다.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삶의 순간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삶은 나아간다’ 장인喪중에 책 제목과 머릿말을 완성했습니다. 책을 만들면서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던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우리네 삶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재선충으로 고사된 소나무 숲에 조성된 강원 인제군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 하얀 수피에 검은 상처들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떨어뜨린 흔적들이다. 마포 임시선별검사소에서 만난 한진희 간호사 백 년의 미소로 행복의 비밀을 전해준 김순택 할머니. 산동네서 연탄배달 봉사하는 인채원 씨와 안경원 씨. 미사가 중단된 명동성당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루치아 자매님 연천 당포성으로 휴가나온 민준이네 가족. 꽃처럼 활짝 웃고 싶다는 취준생 함혜민 씨와 김은영 씨 ‘Mr. 남대문 콩글리시’ 남대문시장 노점상 주재만 씨. 희망의 빛’을 찾아 나선 1年 자작나무 숲을 걷습니다. 하얀 나무들이 아침 햇살에 눈 부십니다. 기지개를 켜고 긴 숨을 들이마시자 청량한 기운이 몸속 가득 스..
텅 빈 해변에 구름만 가득하다. 드넓은 모래사장 너머로 바다와 맞닿은 하늘에 구름이 물결친다. 할매바위 앞 외로운 등대는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겨울 바다에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모든 모임은 취소됐고 어느 때보다 분주했을 송년의 거리는 적막하기만 하다. ‘감염’이라는 공포가 찬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면서 사람들은 더욱 움츠러들고 마스크 속으로 깊숙이 숨어들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내 기억 속에 일몰이 가장 아름다웠던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을 찾았다. “날씨도 코로나랑 같이 가는 것 같아요.” 코로나가 극성이니 하늘마저 우울해하는 것 같다며 문화관광해설사 홍경자(67) 씨가 인사를 건넨다. 관광객이 많이 와 가장 바쁘고 보람찰 때지만 올해는 그런 희망을 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됐을 때 잠시..
콧등에 땀이 솟아나고 숨이 차오른다. 억지로 잠을 청해 보지만 버스는 더디기만 하다. 대부분 눈을 감고 있거나 차창 밖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 숨 막히는 일상이 5개월째 되풀이되고 있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과연 끝이 있기나 한 걸까’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차에서 내려 잠깐 마스크를 벗고 숨을 몰아쉬자 ‘휘이’ 하는 휘파람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마치 오랜 잠수 끝에 물 위로 얼굴을 내민 해녀들의 숨비소리 같다. 한 번 더 긴 숨을 내쉬니 ‘하아~’ 소리와 함께 해녀 할머니 한 분이 해삼, 멍게가 가득 든 망사리를 짊어지고 내 기억 저편에서 걸어오신다. 제주 추자도 옆 작은 섬 횡간도의 고정심 할머니다. ‘휘호이~ 하아~’ 오랜 물질 끝에 물 밖으로 나와 숨을 몰아쉬는..
‘딸랑 딸랑 딸랑.’ 맑고 시린 풍경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진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독경 소리에 맞춰 연등들이 춤을 춘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도심 속 사찰 길상사를 찾았다. 네 마리의 암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길상7층보탑 주변을 돌며 지친 마음을 다독이다 문득 잊고 지내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만인간 다 편하고 다 평화로워, 화목을 이루면 우리 자식들에게 좋겠죠. 자식들 공만 안 드립니다. 우리나라가 편해야 돼요. 한 몸 한뜻으로 모두 편하게 해주십쇼.” 마치 랩을 하듯이 중얼거리며 기도를 하신 할머니는 앞치마에 고이 가져온 방울토마토 몇 알을 돌탑 위에 올려놓으셨다. “정성이 부족해서 우짠디요, 더 사갖고 올 것인디 이렇게 왔네요.” 햇살이 곱던 그날, 두륜산 만일지암 오층석탑 앞에서 기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