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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겨울비가 장마처럼 내린다. 마지막까지 가을을 붙잡고 있던 단풍잎들이 속절없이 떨어진다. 어느 애들은 화단위에서 꽃과 어우러지고 어느 애들은 하수구 철장을 꽃처럼 장식했다. 그리고 돌계단 내려앉은 단풍잎들은 ‘절규’ 하며 뭉크 아저씨를 깨운다.
가을을 오랫동안 붙잡고 싶어 단풍잎들을 책속에 끼워두었습니다. 책갈피에서 잘 마른 단풍잎들이 시골집 사랑방 낡은 격자문 위에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다시 피어납니다. 어릴 적 손자들이 들락거리는 문은 오래 가지 못해 할머니는 창호지를 덧대 마른 풀꽃이나 단풍잎 등을 넣으셨습니다. 궁핍함 속에서도 삶의 여유를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유년의 추억과 함께 피어오릅니다.
코로나를 잘 이겨낸 두분의 어머니를 모시고 동해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들은 오래간만의 여행으로 사돈을 떠나 친구처럼 좋아하십니다. 시리도록 맑고 푸른 하늘이 어머니들의 여행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행이란 단어를 잊고 사셨던 어머니들이 무척 설렜나 봅니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 염색을 해서 한층 젊어 보이십니다. 장모님은 옷을 새로 사고 파마도 하셨습니다. 내색은 안했지만 오래 전 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셨다고 합니다. "다시는 바다를 못 볼 줄 알았는데..." 아흔이 넘으신 장모님이 바다를 바라보며 감격해 하십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시던 어머니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지금은 돌봄 대상이 된 두 분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단풍잎들이 사랑방 창호문 위에서 오후 햇살에 다시 피어납니다. 두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평화가 찾아듭니다.
“그냥 헐고 새로 짓지” 100년 가까이 된 고향집 사랑채를 그것도 10년 이상 방치된 사랑방을 직접 복원한다고 했을 때 마을 분들이 보인 한결같은 반응이다. “요즘 귀뚜라미(보일러) 좋은데 뭐 하러 고생해~” 구들장을 걷어내고 하루 종일 벽돌과 씨름하는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지나가던 이웃집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가에 생생하다. “그냥 좋아서요.”라며 웃음으로 화답했지만 구들을 드러내고 무너진 고래둑을 쌓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게 이른 봄부터 시작된 고향집 사랑채 복원작업이 찬바람이 불어서야 어느 정도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주말을 이용해 작업하다 보니 일은 더디었고 모든 공정 하나하나가 간단치 않았다. 8개월간의 여정이었다. 코로나19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블루..
파란 하늘아래 미루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산책길을 따라 심어진 스크렁들은 바람결에 덩실덩실 춤을 춘다. 서울 이촌한강공원 풍경이다. 어깨동무 하며 그 길을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아슴아슴 추억이 떠오른다. 아마도 이 아이들만 한 때 였나보다. 할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아오던 길에는 논두렁을 따라 키 큰 미루나무들이 있었다. 더운 여름날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면서 몰래 맛보던 그 막걸리 맛이 얼마나 맛있던지... 그 달콤했던 유년의 추억에 동요 한 자락이 입안에서 맴돌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 있네.....’ 서울시는 2017년부터 한강 동서를 잇는 약 40km 길이의 ‘미루나무 백리길’을 조성했다. 시원하게 뻗은 미루나무 길을 걷다보면 추억의 한 자락을 길어 올릴 수 있..
고동색 알밤 삼 형제가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여름내 뾰족한 가시로 무장하고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열매를 꼭꼭 품고 키우던 밤나무들입니다. 급한 마음에 억지로 밤송이를 털어서 알밤을 꺼내면 가시를 세우며 쉽게 열매를 내주지 않던 밤나무가 찬바람이 불자 순순히 열매를 내어 줍니다. 무르익는다는 것은 참고 견디어 내는 것, 그리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란 진리를 밤나무에게 배웁니다. 인생의 가을이 왔건만 아직 가시를 내세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유난스러웠던 날씨에도 풍성한 열매를 맺고 깨달음까지 선물한 밤나무가 고맙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한 택배노동자가 차량에서 배달할 물건을 내리고 있다. 코로나19로 택배 물량이 늘어난 데다 추석을 앞둔 때라 아직 배달하지 못한 물건이 빼곡히 쌓여 있다. 누구든 이 시간이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텐데…. 반갑지 않은 비마저 내려 일손이 더뎌 보인다. 집에 와보니 현관문 앞에 택배가 놓여 있다. 언제부턴가 문 앞에 놓인 택배를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택배 상자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편리함 뒤에 감춰진 소중한 노동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 촬영노트 우연히 마주한 풍경이 마음을 움직인다. 그 마음을 사진으로 담고 싶을 때 몸의 일부처럼 돼 버린 스마트폰이 그 소원을 해결해준다. 노출, 셔터 스피드, 감도, 초점 등 알아서 계산해 순..
가는 여름이 아쉬웠나봅니다. 공원 주변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다람쥐가 ‘득템’한 아이스크림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인기척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과 눈을 맞추고 앙증맞은 혀를 내밀며 먹는 모습이 사뭇 진지합니다. 녀석의 꿀맛 같은 순간을 방해 할까봐 가만히 숨죽이며 바라봅니다. 새끼들 걱정, 도토리 모을 걱정……. 다람쥐라고 근심이 없을까마는 그래도 우연히 찾아든 행운을 즐기는 이 순간, 다람쥐는 행복해 보입니다. 녀석 입맛 변할까 괜한 걱정도 되지만 힘겨운 우리의 일상에도 문득 다가올 달달한 순간들을 그려보며 혼자 미소 짓습니다.
아이들이 계단 위까지 뜀박질을 합니다. 먼저 올라간 아이는 신이나 만세를 부르고 뒤따라온 아이는 부지런히 계단을 오릅니다. 그러건 말든 다른 아이는 줄넘기로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합니다. 어른들은 돌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아이들은 이제야 제 세상을 만난 듯 신이 났습니다. 푹푹 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코로나의 기세는 겪일 줄 모릅니다. 숨막히는 일상이 계속되지만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뭉게구름과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 모습이 지친 마음을 위로해 전해줍니다. ------------------- 배경과 대비되는 실루엣(그림자를 뜻하는 프랑스 용어)사진은 잘 사용하면 시선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빛의 반대편은 다 까맣게 표현되기 때문에 사람의 경우 배경 속에서 더 도드라져 작게 보이는 피사체라도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