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빛으로 그린 세상/생명을 찾아서 (32)
빛으로 그린 세상
공원 산책길에서 자작나무 옹이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내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듯 선명한 눈빛이다. “너 많이 힘들구나.” 상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열대야로 잠을 설치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괜히 집고양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나선 길이었다. “응 지금 좀 힘드네.” 주절주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말을 하자 자작나무 눈이 반짝였다. “이 상처는 내가 아팠던 흔적이야” “하지만 지금은 내 몸의 상처가 세상을 보는 눈이 되었어.” 돌처럼 단단해진 옹이를 어루만져주자 자작나무도 축 처진 내 어께를 다독인다. “힘내” 마음이 통하면 모든 것이 통하나 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겨울의 그림자가 아직 가시지 않은 깊은 산속. 찬바람에 여린 솜털을 떨면서도 봄소식을 전해주려 언 땅 비집고 나온 가냘픈 노루귀.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다만 자기 자신으로 피어나서 최선을 다해 머물다 가는 아름다운 삶. 이런 노루귀를 닮은 민초들이 이 땅의 곳곳에서 말없이 피고 지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봄봄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노루귀라는 정다운 이름은 꽃이 지고 새로 나온 잎 모양이 노루의 귀와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
경황이 없어 끼니를 놓쳤다. 어머니가 시골집 마당에서 쓰러지셔서 병원 응급실까지 내달리며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입원까지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하루해가 다 갔다. 갈증과 허기가 동시에 몰려왔다. 병원 근처 식당 구석에서 혼자 설렁탕을 먹고 있었다. 뜨거운 국물이 타들어 가던 속을 채워주었다. 몇 숟갈 뜨다가 국물 위에 떠오른 하트 모양 파 두 조각에 눈길이 머물렀다. 한동안 그 모습을 보는데 뜨거운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아닌 척, 괜찮은 척하며 묵묵히 견뎌왔는데…. “얘야, 괜찮다. 어서 먹어.” 고통 속에 신음하면서도 도리어 자식을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고동색 알밤 삼 형제가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여름내 뾰족한 가시로 무장하고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열매를 꼭꼭 품고 키우던 밤나무들입니다. 급한 마음에 억지로 밤송이를 털어서 알밤을 꺼내면 가시를 세우며 쉽게 열매를 내주지 않던 밤나무가 찬바람이 불자 순순히 열매를 내어 줍니다. 무르익는다는 것은 참고 견디어 내는 것, 그리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란 진리를 밤나무에게 배웁니다. 인생의 가을이 왔건만 아직 가시를 내세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유난스러웠던 날씨에도 풍성한 열매를 맺고 깨달음까지 선물한 밤나무가 고맙습니다.
가는 여름이 아쉬웠나봅니다. 공원 주변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다람쥐가 ‘득템’한 아이스크림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인기척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과 눈을 맞추고 앙증맞은 혀를 내밀며 먹는 모습이 사뭇 진지합니다. 녀석의 꿀맛 같은 순간을 방해 할까봐 가만히 숨죽이며 바라봅니다. 새끼들 걱정, 도토리 모을 걱정……. 다람쥐라고 근심이 없을까마는 그래도 우연히 찾아든 행운을 즐기는 이 순간, 다람쥐는 행복해 보입니다. 녀석 입맛 변할까 괜한 걱정도 되지만 힘겨운 우리의 일상에도 문득 다가올 달달한 순간들을 그려보며 혼자 미소 짓습니다.
삼복더위에 자벌레가 길을 나섰습니다. 거꾸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한껏 등을 굽혀 몸을 길게 늘이기를 반복하여 앞으로 나아갑니다. 힘겹게 여름을 나는 자벌레를 들여다보다 하루하루 숨쉬기조차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입니다. 언젠가는 번데기의 허물을 벗고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날겠지요. 시절인연을 기다리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자벌레가 삶의 스승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도 숲속의 수행자 자벌레는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여름 속을 가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비둘기 한 마리가 제 마음속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날개 끝에 두 줄의 갈색 무늬가 있는 비둘기입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나무 그네에 앉아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종종거리며 먹이를 쪼고 있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한쪽 발가락이 모두 잘리고 발목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균형이 맞지 않는 다리로 뒤뚱거리며 이리저리 힘겹게 걷는 모습에 콧등이 시큰거렸습니다.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을까?” 그때부터 습관처럼 그곳에 가면 그 비둘기를 찾게 됐습니다. 가끔 마주치는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한테 뒤처지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마음이 컸는데 그 당당한 모습에 저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
까치 한 마리가 긴 나무가지를 입에 물고 자동차 사이를 깡충깡충 뛰어 다닙니다. 까치가 집을 지으려면 나뭇가지가 적어도 천 개는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심의 까치에게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정하는 것도, 집 지을 재료를 구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보입니다. 그래도 새끼를 낳고 기를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심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닙니다. 집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요즘, 도심에서 마음껏 자기 집을 짓고 있는 까치가 한편 부럽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기대해 봅니다. 사진,글=김선규 선임기자
잔설이 남은 산 한 모퉁이에 작고 여린 싹들이 얼굴을 내민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자신의 온기로 눈을 녹이고 있다. 산도 개울도 아직은 꽁꽁 얼어 모든 것이 숨죽인 듯하지만, 봄은 우리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다. 여린 싹을 보니 코로나19로 잔뜩 얼어붙은 우리네 가슴속에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기지개를 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