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빛으로 그린 세상/생명을 찾아서 (32)
빛으로 그린 세상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뜨거운 한낮의 햇살이 서서히 베란다에 들어온다. 물풀과 다슬기 두어 마리 그리고 금붕어 한 마리가 살고 있는 항아리에도 햇살이 쏟아진다. 그늘 한 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금붕어는 간간이 가슴지느러미만 살랑거릴 뿐, 한가롭게 헤엄을 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물고기는 그 안에서 잠을 자는 듯 꿈을 꾸는 듯 하다. 이 금붕어는 어린이날 선착순으로 받은 무료 사은품이었다. 동네 대형 할인판매점에서 ‘어린이들에게 금붕어 세 마리를 무료로 나누어 준다’는 방송이 나가자 우리 아이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었다. 순간 망설였다.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우리 집에 살아 들어왔다가 죽어나갔던가. 앵무새, 금화조, 장수풍뎅이, 물고기 등등, 아파트 화단 후미진 곳에 아예 지정 묘지가 있..
봄꽃들이 한바탕 잔치를 끝내고 떠난 빈 자리에 수줍은 듯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고 피어난 때죽나무 꽃. 비가 내린 후 옛 처녀처럼 수줍음 많은 이 꽃이 보고싶어 다시 찾았더니 대지에 소복이 별처럼 내려앉았다.
피부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햇살이 바닷가 염전을 달굽니다. 열기가 이글거리는 염전에는 윗옷을 벗어 던진 채 외발 손수레로 소금을 실어나르는 염부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집니다. 파란 하늘과 하얀소금, 그리고 구릿빛 피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남들은 더워 죽겄다구 난리지만, 우리는 더위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지유” 그의 몸에 여름내내 쌓인 햇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소금과 땀으로 늘 절여져 있지요. 하지만 후끈거리는 열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위에 감사하는 마음이 은근히 전해집니다.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 소금밭에서 얻은 소금같은 지혜였습니다
자신을 닮은 새로운 생명을 꿈꾸며 물길을 따라 콘크리트 장애물을 힘차게 뛰어 오르는 잉어. 차가운 바닥에 곤두박질칠지언정 수만 년 계속 되어온 저 지독한 본능이여.
한 아이가 태어나 세상과 만나는 날, 이날은 한 생명이 온 우주와 만나는 날입니다. 엄마의 손을 처음 잡아 본 아이의 손. 너무 꽉 쥐어 핏기마저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불안했을까요.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게게 오로지 믿을 건 엄마밖에 없었겠지요. 엄마의 검지 손가락과 아이의 손바닥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핏줄처럼 서로 흐르고 있을 겁니다. 우리도 이렇게 엄마손을 꽉 쥐어 본 적이 있었겠지요. 어제도 그제도 그냥 의미없이 살아가는 나날속에 우리는 지금 무얼 잡고 살고 있는지요...
무인도 취재를 위해 덕적도 진리에서 서포리 선착장으로 가는 길. 시멘트 도로 위에 꿈틀 거리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꽃뱀으로 불리는 유혈목이였습니다. 상처 입은 유혈목이가 피를 흘린채 필사적으로 자신의 알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아마 도로위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자 본능적으로 알을 쏟아내고 그것을 지키고 있었던것 같았습니다. 끝까지 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유혈목이를 간신히 숲으로 돌려보냈지만 알들은 무섭게 달려오던 트럭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렷습니다.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에게 세상을 열어주려는 엄마 뱀의 처절한 모정이 섬을 떠나서도 한동안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장마가 시작되던 날, 나무 밑동 철사 줄에 앉아 참새들이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평소엔 조그만 먹을 것을 가지고도 아등바등 싸우던 녀석들입니다. 온몸이 젖고 날씨가 음산해지자 서로에게 기대며 추위와 배고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비 내리는 날 누군가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지는 건 비단 참새만은 아니겠지요. 서울숲
농부인 아버지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쇠비름. 예초기로 베어버리고 비닐을 덮어놓아도 며칠이면 온 밭을 뒤덮는 쇠비름을 보며 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 “허 고놈들 참 질기다!” 비가 와서 며칠째 작업을 쉬고 있는 공사장, 포클레인 위에 나란히 고개를 내민 쇠비름. 흙 한 줌 없는 쇠붙이에 발을 딛고 서서도 천진난만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나온 한마디, “허 고놈들 참 질기다!‘
무심히 지나치면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꽃입니다. 빛바랜 갈색 낙엽 틈에 피어난 파란 꽃이 하도 예뻐서 길을 가다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름을 몰라서 한참을 찾아보니 봄까치꽃(큰개불알풀)이었습니다. 고개를 들면 흐드러진 벚꽃이 분분히 하얀 꽃잎을 날립니다. 진달래, 개나리도 크고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리며 한바탕 꽃 잔치를 벌이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빛깔과 향기로 수줍게 피어나는 풀꽃들이 있기에 이 봄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2003/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