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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시와 사진의 만남

함박눈 다음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6. 26. 11:44

함박눈 다음/김혜순

해마다 성탄절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새 아기 한 분씩 방문해 오듯이
해마다 겨울날 어느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첫눈송이들이 방문해온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눈이불 아래 누워서
강을 묶어놓은 얼음
얼음짱 밑의 물고기들
그 겨울 물고기들의
조용하고 조용할 밀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눈사태가 빰을 치고 지나간 산머리
그 아래 숨죽인 도토리
눈뜨고 잠든 뱀
네 활개를 쫙 벌린 개구리
눈뜨고 기다리는 수많은 눈동자, 눈동자
그 조용하고 조용할 흰눈이불 속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아침 눈 이불 속에서
아이구 저 아기를 어쩌나
아장거리며 내려노는 내 어린 시절
옹알이하며 다가오는 아기를 맞이한다
눈뜨고 꾸는 꿈속에서처럼
내 품으로 다가오는가 팔 벌리면
어느새사쁜히스러지고없는아기를

해마다 겨울날 어느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이
옹알이 소리 지우며 하얗게 방문해온다
그러면 모두 흰눈이불 아래 누워
그 소리 귀 기울여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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