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자료실/시와 사진의 만남 (40)
빛으로 그린 세상
봄비가 여자를 위로하네/ 정은숙 언덕에 여자가 서있을때 바람부는 쪽으로 덧없는 하루가 또 흘러가네. 세월이 흘러가면 존재는 사라져, 그를 막아선 여자도 사라져 눈물을 흘릴 주체도 사라지네. 낮게 드리운 여자의 하늘도 숨죽여 흔들리는 풀들의 세계도 이제는 아무도 여자를 받아주지 않네. 그때는 여자여 내가 안아주리라, 만나러 가리라. 발목을 적시는 사랑으로 네게로 가리라. 너무 오래 우리는 한 가족임을 잊고 모래바람 속에서 동질감 잃고 살았네. 그 삶이 좋았을 리 있으랴. 이제 봄비도 여자를 위해 내리는데...
나무와 아이들 / 김 후 란 하늘 넓은 세상이 우리 앞에 있어요 믿음직한 나무가 우리 곁에 있어요 나무와 우리 하나가 되어 신나게 뛰어 놀고 배우고 익히고 우리는 학교숲 꿈나무예요 담이 없는 우리 학교 환한 운동장 자연이 숨쉬는 학교숲에서 쑥쑥 자라나 큰 일꾼 될래요 엄마 아빠 선생님 즐겁게 뛰는 우리들 정다운 학교숲을 모두모두 좋아해요
격포에서 / 이문재 더 나아갈 수 없는 어스름과 다시는 돌아가기 어려운 아침 문자 메세지를 보내려다 만다 채석장 앞에서 기우뚱 미끌어진다 얼마 전부터 낯설어진 생애의 단층이 한쪽으로 기운다 목에 걸려 있는 휴대폰을 들어 파도의 이마를 향해 던진다 늦가을 격포는 제대로 어두워져 있다 땅 끝 여기는 해발 제로 선(線)에서 점으로 내가 먼저 와 있다 천년 저쪽에서 달려온 별빛들이 다시 천년 저쪽으로 달려나간다 격포에서 격포로 망명한다 나의 근황은 이제 나만의 근황이다 내가 먼저 와 있는 것이다 ('격포에서' 일부,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
에미 /송해월 푸르륵 푸르륵 풀숲에서 풀숲으로 실바람에도 몹시 흔들릴 것 같은 저 조그만 몸뚱어리 종종거리며 바쁘게 옮겨다니더니 가만, 알을 품었구나 저렇게 조그매도 에미로구나, 너 에미로구나 콩알 같은 까만 눈 경계의 빛 날카로워도 온통 착하게만 보여 너 어떡한다니 그 작고 순한 몸으로 세상을 향해 겁없이 맞서는 모성(母性)은 너에게도 참으로 눈물겹고 거룩한 것이었구나 그래, 에미로구나 저렇게 조그매도 에미로구나 에미라면 그래야지 그래 그래야지.
작은 물방울 모여 맑은 시냇물 바위 넘어 흐르듯 날이 밝으면 어디선가 다가와 감도는 향기로움 난초蘭草 잎 닦으며 내일을 바라보며 유리창 퉁기는 우리 가족 정다운 목소리 평생 물리지 않는 밥처럼 난 향기 은은히 미소로 마주 보는 얼굴. 김 후 란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뜨거운 열정으로 - 능소화 / 최경애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연초록 새봄에 말라비틀어진 나무줄기로 오래도록 침묵하는 그 때는, 게으른 줄로만 알았습니다. 분주히 꽃을 피우는 나무 사이로 느릿느릿 잎사귀를 내미는 그 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무성한 녹음만이 한창인 긴긴 여름에 이토록 뜨거운 열정으로 피어날 줄은. 오랜 침묵과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열정을 키워가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배롱나무꽃/김선규 무엇을 위한 간절한 염원일까. 석 달하고도 열흘 지는 줄 모르게 쉼 없이 피어나는 꽃. 쏟아지는 장마와 뜨거운 햇살에도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한결같은 마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