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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한 아이가 태어나 세상과 만나는 날, 이날은 한 생명이 온 우주와 만나는 날입니다. 엄마의 손을 처음 잡아 본 아이의 손. 너무 꽉 쥐어 핏기마저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불안했을까요.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게게 오로지 믿을 건 엄마밖에 없었겠지요. 엄마의 검지 손가락과 아이의 손바닥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핏줄처럼 서로 흐르고 있을 겁니다. 우리도 이렇게 엄마손을 꽉 쥐어 본 적이 있었겠지요. 어제도 그제도 그냥 의미없이 살아가는 나날속에 우리는 지금 무얼 잡고 살고 있는지요...
무인도 취재를 위해 덕적도 진리에서 서포리 선착장으로 가는 길. 시멘트 도로 위에 꿈틀 거리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꽃뱀으로 불리는 유혈목이였습니다. 상처 입은 유혈목이가 피를 흘린채 필사적으로 자신의 알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아마 도로위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자 본능적으로 알을 쏟아내고 그것을 지키고 있었던것 같았습니다. 끝까지 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유혈목이를 간신히 숲으로 돌려보냈지만 알들은 무섭게 달려오던 트럭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렷습니다.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에게 세상을 열어주려는 엄마 뱀의 처절한 모정이 섬을 떠나서도 한동안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낡은 고무신 한 켤레가 왜 이렇게 마음을 끄는지 모르겠습니다. 뒤축이 낡아서 정성스레 꿰맨 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낡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농부의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듯합니다. 꿰맨 고무신은 그래서 궁색해보이지 않습니다. 낡고 오래됐지만 아직도 주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자부심은 새 것이 받는 사랑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까요. 새 것만 좋아하는 우리 세대를 돌아봅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새 것이 아니라 손때 묻고 정든 물건이라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기름값이 오르는 요즈음, 그래서 농부의 낡은 고무신이 더 마음에 다가왔나 봅니다.
낡은 화장실 안을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다. 작은 창문 방충망 너머로 기웃거리는 담쟁이 넝쿨. 무엇이 그리 궁금할까? 고 녀석들, 볼 테면 실컷 봐라!
제 막내아들입니다. 아들 셋 중에서 유독 먹을 것에 대해 집착도 많고 욕심도 많습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우동을 먹었습니다. 형들의 젓가락질이 분주해지자 마음이 다급해진 막내는 서툰 젓가락질을 그만두고 그릇째 들고 마십니다. 냄비가 바닥을 드러내자 이번에는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주위의 눈치를 살핍니다. 결국 엄마 아빠 몫을 막내에게 덜어주지만 그래도 자꾸 줄어드는 우동이 아쉽기만 합니다. 형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가는 막내의 생존전략입니다.
″따따따 탕---″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굶주린 이리와도 같은 임채성 일병과 외딴 골목에서 마주쳤다.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있는 필자에 비해 K1자동 소총과 수류탄으로 중무장한 그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살벌했다. 결투가 시작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미처 다섯을 세기도 전에 또 다른 중무장한 군인들이 총을 난사하자 임 일병이 쓰러졌다. 카메라 속으로 빨려들어온 임일병은 피거품을 문 채 총기를 난사하며 수류탄을 정신없이 던지고 있었다. 필자의 온몸은 산산조각 부서졌다.--- 꿈이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지난(1993년) 4월 19일 있었던 무장탈영병 도심 총기난동사건 취재를 마친 뒤 매일 이와 같은 악몽에 시달렸다. 그날은 4.19혁명 33돌을 맞은 아침이었다..
장맛비가 숨고르기를 하는 사이 물방울이 맺힌 풀잎 위를 달팽이 한마리가 천천히 걸어갑니다. 너무 오래 걸린다고, 등에 짐이 무겁다고 투정하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갑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고 빨라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세상입니다. 잠시 달팽이의 발걸음에 호흡을 마쳐보며 그 느림의 여유를 즐겨봅니다.
장마가 시작되던 날, 나무 밑동 철사 줄에 앉아 참새들이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평소엔 조그만 먹을 것을 가지고도 아등바등 싸우던 녀석들입니다. 온몸이 젖고 날씨가 음산해지자 서로에게 기대며 추위와 배고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비 내리는 날 누군가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지는 건 비단 참새만은 아니겠지요. 서울숲
농부인 아버지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쇠비름. 예초기로 베어버리고 비닐을 덮어놓아도 며칠이면 온 밭을 뒤덮는 쇠비름을 보며 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 “허 고놈들 참 질기다!” 비가 와서 며칠째 작업을 쉬고 있는 공사장, 포클레인 위에 나란히 고개를 내민 쇠비름. 흙 한 줌 없는 쇠붙이에 발을 딛고 서서도 천진난만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나온 한마디, “허 고놈들 참 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