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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1996년 4월 23일 12시 22경 강원도 고성의 야산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군부의 폭발물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산불은 폭발물의 위험이 산재해 있는 발화지점의 특별한 지형적인 여건으로 초기진화에 실패하였다. 단순한 화재로 생각되었던 산불은 때마침 불어오는 강풍과 어우러져 춤을 추듯 이산 저산으로 옮겨 다니며 산림과 가옥 등을 초토화 시켰다. 사흘 낮과 밤 기승을 부리던 불이 진화되었을 때 북으로 금강산과 남으로 설악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주요 길목인 고성군 죽왕면, 토성면 일대가 시꺼먼 숯덩이로 변하였다.
설악산 미시령 고개를 넘어 고성땅에 들어서면 늘 가슴이 설렌다. 아무런 이유없이 마음이 분주해지고 발길도 덩달아 빨라진다. 해안도로를 따라 그냥 지나치려고 바다로 눈을 돌리지만 마음뿐이지 어느덧 검은 숯덩이 산속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7년째 버릇처럼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아마도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내 가슴 속에 박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96년 4월 26일. 거침없이 이산 저산을 날아다니고 있는 불덩이들---.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강원도 고성에서 목격했다. 그 불덩이는 동해의 파도보다 더 큰 기세로 마을을 집어 삼켰다. 금강과 설악을 잇는 백두대간의 푸른 소나무들이 그 기세 앞에 앙상한 몰골로 변하고 있었다. 그 불덩이는 그렇게 사흘 밤낮 맹..
“바스락, 바스락” 놈이 또 나타났다. 나는 숨을 죽였다. 혹시 놈이 들을 세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내딛으며 놈에게 접근을 하였다. 드디어 잡았다 이놈!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저격 라이플 같은 망원 렌즈를 착용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놈과 사투(?)를 벌인 지 30분 후에야 드디어 놈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평소에 산책을 다니며 수많은 참새, 까치 그리고 청설모를 발견하여 사진기에 담으려고 해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 대면, 이미 저만치 도망가 있거나, 알아채지 못하게 멀리서 찍으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점처럼 나와서 나는 그 역동적인 동물들을 찍을 생각을 일찍이 단념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빠가 망원 렌즈를 빌려주었다. 내 18-55m..
사방이 어둡고 고요하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이라서 그런지 너무나 조용하다. 정적이 흐르는 고요함을 헤쳐 나가며 마침내 연꽃으로 덮여있는 호수에 도착하였다. 그 넓은 호수가 다 연꽃으로 덮여있는 모습이 신기해서 나는 카메라를 빨리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확인해 본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시 카메라를 들고 해가 뜨기 직전 호수의 멋진 광경을 계속 찍었다. 나는 사진을 확인하고 내가 찍은 사진들이 다 한결같이 공통점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또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왜 사진들이 다 푸르딩딩하지?” 분명히 눈으로 본 호수는 그러지 않았는데, 내가 찍은 호수의 풍경 사진들에는 모두 선한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혹시 카메라가 고장 났을..
1. 사진산책을 나서며(아빠, 아들 서문) 2. 사진을 배움 1-빛(생명을 불어넣는 따뜻한 손길) 2-렌즈(스나이퍼) 3-셔터(찰나의 공간과 시간을 담는 소리) 4-조리개(배경을 단순히) 5-프레임(그림은 더하기 사진은 빼기) 6-눈높이(앵글이 달라지면 피사체와 배경의 모양이 달라진다) 7-사람 눈&카메라 눈(안개낀 날) 8-카메라(카메라는 깡통) 9-야경촬영(자전거 궤적, 별사진) 10-초상권(남의 눈 의식) 3. 사진을 통한 성장 1-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2-모든 생명은 귀하다(할미꽃) 3-성장의 아픔(옹이) 4-사진은 무의식을 비추는 거울(길양이) 5-시간의 상대성 6-하늘은 넓다 7-마지막 사진산책을 나서며(눈덮힌 세상) 8-스마트폰 촬영 4. 사진을 통한 소통(맺음말) -배움, 성장 그리고 ..
나는 대한민국 고3이다. 공부만이 내게 허락된 일이라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공부만 하고 살까. 하지만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나는 대한민국의 어느 고3가 마찬가지로 책상->식탁->변기의 경로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점수는 점수대로 안 나오고,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쌓이면서 피부도 안 좋아지고 짜증만 늘었다.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났지만, “왜 이러고 사나” 싶어서 침대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였다. “준우야, 아빠랑 산책이나 다녀올까?” 하고 아빠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셨다. 머리는 “공부 해야 돼!!” 라고 연신 소리를 질렀지만, 이상하게 가슴은 갑자기 쿵쾅거리며 아빠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렇게 아빠와 산책을 나간 건 정말..
일산으로 이사 온 지 10년이 되어간다. 생명을 주제로 사진작업을 하던 나에게 이곳은 천국이었다. 꽃다지, 냉이, 별꽃등 봄이면 어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꽃부터 화려한 향기를 뽐내는 목련, 벚꽃, 수수꽃다리등 사계절 찾아드는 자연의 친구들을 벗하며 그것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업은 내 삶의 소중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하늘, 호수, 나무, 꽃...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산책을 나설 때 마다 같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다르고 새벽과 아침, 저녁의 모습이 다 달랐다. 그 산책길에는 지금은 대학생이 큰 아이부터 중학생이 된 막내아들까지 식구들이 동행하곤 했다. 아내와의 산책길에는 늘 아이들 커가는 문제가 화재로 등장했고 집안문제도 빠지지 않고 대화메뉴로 등장했다...
산딸기 익을 무렵 / 나희덕 아기를 들쳐 업은 한 여자의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보았네 숨어서 익어가는 산딸기를 숨어서 도란거리는 지붕들을 입맞출 수도 없이 낮은 곳에 피어나 잎새 뒤에 숲 뒤에 숨은 작은 마을을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그 울음에 산딸기 좀더 익으면 땅거미가 내려와 붉은 열매를 감추는 저녁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들었네 산딸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무사하라 무사하라 부르는 그 노래를 녹슬어가는 함석 지붕 아래서 나는 들었네
한 포기의 집/나희덕 장마가 들이닥치기 전 배추를 거두려고 서두르는 손 잎을 들출 때마다 한 포기씩 뽑힐 때마다 수룩수룩 딸려나오는 목숨들, 잎부터 뿌리까지 한 틈바구니도 남기지 않고 푸른 지붕 아래 오글오글 정들어 살던 온갖 날것과 기어가는 것들이여. 한 목숨에 붙은 목숨들 이리도 많다니! 한 포기의 배추가 실은 한 채의 집이었다는 걸 안다 해도 장마 오기 전 서두르는 손들, 더 멀리 날아가는 날개들, 흙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작은 발들.
삿대 저어가네/정끝별 눈먼 나뭇가지 꺾어 저어가네 가지가 물에 잠기면 물살을 가지고 노는 배의 몸 잠기면 나아가고 나아가며 들어올려 미끄러지듯 길을 열고 봄의 배가 힘겹게 몸 가누는 동안 간신히 뻗어 강의 마음을 받쳐드는 저 삿대의 손 봄의 배가 힘겹게 제 몸 견디는 동안 묵은 강의 바닥을 어루만지는 저 삿대의 마음 구르는 강바람에 살끝이 닳아버린 안개는 눈물 자욱 깊은 강기슭에서 웅크려 떨다 강 건너 청미래 덩굴숲을 눈멀게 하고 세월아 네월아 오뉴월을 건너는 눈먼 배야 강 건너 푸른 방 한 칸을 향해 저어가니? 삿대 저어 나를 저어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