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분류 전체보기 (400)
빛으로 그린 세상
감 / 강은교 얽힌 길 풀어, 풀어 돌아왔네 ___ 이 빛 바드시오 ___ 이 빛 바드시오 그대 목소리 어디에선가 들려 ___ 이 빛 바드시오 ___ 이 빛 바드시오 따순 허공에 주홍빛 뺨 문지르는 기쁨의 속가슴 뒤 돌아왔네 얽힌 길 풀어, 풀어.
나는 황소처럼 느리게 갈 것이다 / 신현림 잠시라도 느슨해지고 싶어 푸른 정자처럼 앉아 강물을 굽어본다 가장 풍요한 방식으로 마음을 눕혀 벽이란 벽 문이란 문 다 열고 귀와 눈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 다 열면 바람이 난지 내가 바람인지 모른다 스피드가 다는 아닌데 세상이 얼마나 빨 리 흐르는가 스피드는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여운없는 삶이란 얼마나 메마른가 당신은 빨리, 빨리, 빨리, 외치며 달려도 나는 황소처럼 느리게 걸을 것이다 땅에 입맞춤하며 느리게 모든 것을 음미하며 느리게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신현림 배가 고프면 밥지어 먹고 쓸쓸해지면 달무리에 감싸인 달처럼 당신 팔에 휩사여 깊은 잠을 자리 가슴의 갈대밭에 달아오르는 당신 심장 그 아늑한 노을을 느끼며 함께 있는 것에 새삼 놀라리 가슴 속으로 산비둘기 한 마리 날아오면 밤새도록 눈이 내린 길을 보며 나는 일어나 다시 살리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함박눈 다음/김혜순 해마다 성탄절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새 아기 한 분씩 방문해 오듯이 해마다 겨울날 어느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첫눈송이들이 방문해온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눈이불 아래 누워서 강을 묶어놓은 얼음 얼음짱 밑의 물고기들 그 겨울 물고기들의 조용하고 조용할 밀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눈사태가 빰을 치고 지나간 산머리 그 아래 숨죽인 도토리 눈뜨고 잠든 뱀 네 활개를 쫙 벌린 개구리 눈뜨고 기다리는 수많은 눈동자, 눈동자 그 조용하고 조용할 흰눈이불 속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아침 눈 이불 속에서 아이구 저 아기를 어쩌나 아장거리며 내려노는 내 어린 시절 옹알이하며 다가오는 아기를 맞이한다 눈뜨고 꾸는 꿈속에서처럼 내 품으로 다가오는가 팔 벌리면 어느새사쁜..
배달의 기수/ 김혜순 서울에 살면 태양도 배달온다 구름도 배달온다 바람도 배달온다 나는 오늘 창문을 열고 퀵 서비스로 도착한 눈보라를 풀어본다 정오엔 삼척에 사시는 엄마가 보낸 깊은 바다가 도착했다 여기가 깊은 바다 속 어느 집 안방이냐 심해에서 온 게들이 두 눈을 껌벅인다 잠결에도 드리는 집 앞에 오토바이 멈추는 소리 누군가 겨울밤을 집집마다 부려놓고 가는 소리 아무도 받아주지 앉자 택배 꾸러미를 박차고 나온 초승달이 미끄덩거리며 비상계단을 오르는 소리 식반을 머리에 인 아저씨가 빈 그릇 내 놓으라 주먹으로 대문을 꽝꽝 두드리는 소리
눈 길 / 황 인 숙 발바닥을 튕겨내듯 가볍게 잡아당긴다 귓속에서 속삭이는 아니, 발바닥이 직접 듣는 바삭 소리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하양 끝없이 점멸하는 1만 가지 색채의 까망
봄의 꿈 / 황인숙 봄비가 보습처럼 완고하고 무표정한 하늘을 바스라트렸다 어디론가 가 보고 싶지만 그곳이 내게로 온 것도 같다 사방간 데로 꿈틀거리는 아지랑이 속을 사방간 데로 걸으리 땅에 갓 뿌리를 묻은 묘목들도 무덤들도 푸르러지리.
봄비가 여자를 위로하네/ 정은숙 언덕에 여자가 서있을때 바람부는 쪽으로 덧없는 하루가 또 흘러가네. 세월이 흘러가면 존재는 사라져, 그를 막아선 여자도 사라져 눈물을 흘릴 주체도 사라지네. 낮게 드리운 여자의 하늘도 숨죽여 흔들리는 풀들의 세계도 이제는 아무도 여자를 받아주지 않네. 그때는 여자여 내가 안아주리라, 만나러 가리라. 발목을 적시는 사랑으로 네게로 가리라. 너무 오래 우리는 한 가족임을 잊고 모래바람 속에서 동질감 잃고 살았네. 그 삶이 좋았을 리 있으랴. 이제 봄비도 여자를 위해 내리는데...
나무와 아이들 / 김 후 란 하늘 넓은 세상이 우리 앞에 있어요 믿음직한 나무가 우리 곁에 있어요 나무와 우리 하나가 되어 신나게 뛰어 놀고 배우고 익히고 우리는 학교숲 꿈나무예요 담이 없는 우리 학교 환한 운동장 자연이 숨쉬는 학교숲에서 쑥쑥 자라나 큰 일꾼 될래요 엄마 아빠 선생님 즐겁게 뛰는 우리들 정다운 학교숲을 모두모두 좋아해요
격포에서 / 이문재 더 나아갈 수 없는 어스름과 다시는 돌아가기 어려운 아침 문자 메세지를 보내려다 만다 채석장 앞에서 기우뚱 미끌어진다 얼마 전부터 낯설어진 생애의 단층이 한쪽으로 기운다 목에 걸려 있는 휴대폰을 들어 파도의 이마를 향해 던진다 늦가을 격포는 제대로 어두워져 있다 땅 끝 여기는 해발 제로 선(線)에서 점으로 내가 먼저 와 있다 천년 저쪽에서 달려온 별빛들이 다시 천년 저쪽으로 달려나간다 격포에서 격포로 망명한다 나의 근황은 이제 나만의 근황이다 내가 먼저 와 있는 것이다 ('격포에서' 일부,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