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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고성 산불, 그 후

절망 딛고 부르는 희망 노래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6. 29. 14:36

설악산 미시령 고개를 넘어 고성땅에 들어서면 늘 가슴이 설렌다. 아무런 이유없이 마음이 분주해지고 발길도 덩달아 빨라진다. 해안도로를 따라 그냥 지나치려고 바다로 눈을 돌리지만 마음뿐이지 어느덧 검은 숯덩이 산속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7년째 버릇처럼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아마도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내 가슴 속에 박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96년 4월 26일. 거침없이 이산 저산을 날아다니고 있는 불덩이들---.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강원도 고성에서 목격했다. 그 불덩이는 동해의 파도보다 더 큰 기세로 마을을 집어 삼켰다. 금강과 설악을 잇는 백두대간의 푸른 소나무들이 그 기세 앞에 앙상한 몰골로 변하고 있었다. 그 불덩이는 그렇게 사흘 밤낮 맹위를 떨쳤다. 인간은 자연이 스스로 불덩이를 거두기까지 너무도 미미한 존재였다.
찌는 듯한 땡볕이 기승을 부리던 그 해 7월. 고성 산불 현장을 다시 찾았다. 다른 곳에서는 숲이 한창 무르익은 기운을 뽐내고 있는데 검게 탄 나무들이 시체처럼 서 있는 그 곳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간혹 떠돌던 구름이 만든 그늘만이 유일하게 쉴 자리를 베풀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새 소리가 들릴까 싶어 귀기울여 봤지만 적막했다. 바람조차도 숨을 죽인 듯했다. 잎 하나 없이 앙상한 나무를 찾는 새나 곤충은 물론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동안 걷다가 우연히 불탄 소나무 사이에서 자라는 싹 하나를 보게 됐다. 좀더 깊숙이 들어서니 하나둘이 아니었다.
 불탄 소나무 사이로 다년생풀과 관목들이 숲의 주인이 되기 위해 파릇파릇 생명의 싹을 튀우고 있었다. 검은 숯덩이 사이로 솟아오르는 생명의 몸짓. 그것은 인간의 실수로 무참하게 짓밟힌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화해와 용서의 몸짓으로 느껴졌다. 그 모습은 발화 당시 보았던 이글이글한  불덩이들과 어우러져 내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진한 감동으로 남았다. 싹들의 성장을 보는 기쁨이 고성 땅으로 내 발길을 계속 유혹했다.
이렇게 시작한 고성 사랑이 벌써 7년이 되어간다. 생태나이 2천 5백여일.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차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 곳 3천7백62헥타르의 땅이 서서히 생명을 되찾고 있다. 주민들은 숲만큼이나 새까맣게 타 버린 가슴을 다독거리며 희망의 나무를 다시 심었다. 산의 모든 나무들이 천연목탄으로 변했지만, 봄이면 어김없이 진달래와 노랑제비꽃이 얼굴을 내밀고 나비들이 날기 시작했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미생물과 미미한 곤충들이 이슬보다 가냘픈 몸짓으로 숲을 가꾸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곳 숲이 불나기 전 상태로 되돌아가지 까지 걸리는 시간을 50-60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검은 숲에서 진행중인 인간의 노력과 미물들의 작고 가냘픈 움직임은 결국에는 이곳 고성 땅을 ‘강원도의 힘’인 푸름의 고향으로 만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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