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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2017. 6. 26. 14:14

나는 대한민국 고3이다. 공부만이 내게 허락된 일이라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공부만 하고 살까. 하지만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나는 대한민국의 어느 고3가 마찬가지로 책상->식탁->변기의 경로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점수는 점수대로 안 나오고,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쌓이면서 피부도 안 좋아지고 짜증만 늘었다.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났지만, “왜 이러고 사나” 싶어서 침대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였다. “준우야, 아빠랑 산책이나 다녀올까?” 하고 아빠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셨다. 머리는 “공부 해야 돼!!” 라고 연신 소리를 질렀지만, 이상하게 가슴은 갑자기 쿵쾅거리며 아빠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렇게 아빠와 산책을 나간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에 산책을 나가서 만끽한 신선한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풍경, 그리고 사진을 찍고 있는 아빠의 모습에 나는 옛날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사진 기자이신 아버지 덕에 나는 거의 걷기 시작할 때부터 많은 자연 여행을 다녔다. 국내의 산이란 산은 거의 다 가본 것 같다. 그때 마다 아빠는 그런 풍경들을 사진으로 담아 내셨고, 나는 종종 아빠 사진의 모델이 되어 드렸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멋있어서 나는 종종 내 머리통만한 카메라를 빌려 달라고 떼를 쓴 후 사진을 찍어 보기도 했다. 자연과 사진, 그리고 아빠와의 일상 탈출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 되었다. 비록 일을 하러 떠난 것이셨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아빠의 여행에 동참하는 것은 어느덧 어린 나의 소소한 행복이 되어 삶의 한편에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다. 힘든 한라산 등반을 불평 하나 없이 가서 만세를 부르며 또 다시 아빠 카메라를 빌려달라고 떼를 쓴 후 사진을 찍어보며 큰 기억은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하지만 나에게도 사춘기라는 불청객이 찾아 왔다. 언제부터 아빠와의 여행 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더 재미있어졌고, 나에게 주말은 더 이상 아빠와 여행을 갈 수 있는 날보다는 친구들과 놀 수 있는 날로 변해 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온갖 스트레스는 다 받으면서 입시를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빠와 멀어지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는 이미 출근하셨고,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빠는 이미 주무시고 계시는 그런 일상만 반복이 되어 갔다. 그나마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주말 조차 나는 독서실로, 아빠는 아빠만의 스케쥴로 서로 바빠서 얼굴 조차 보기 힘들어 지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나에게는 단순히 나를 뒤에서 뒷바라지 해주는, 그런 존재라고 인식이 머리 속에 박혀버렸다. 그렇게 나는 고3이 되었다. 추억의 아빠와의 자연 여행은 어느덧 한 켠의 추억으로만 남아버렸고, 내가 유달리 좋아한 사진 찍기, 그리고 아빠와의 친구 같았던 관계도 이제는 옛날에 찍은 사진들과 함께 먼지만 쌓여갔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나간 산책이 입시 전쟁에 찌든 나에게 너무나 큰 위안이 되었다. 집과 아주 가까이 있지만, 도저히 갈 엄두를 못 내서 갈 시도조차 안 해본 호수공원을 비로소 아빠의 제안으로 가보았는데 너무 상쾌하고 내 스트레스와 근심거리들을 잠시나마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아빠의 제안이 또 기다려졌고, 이번에는 아빠의 카메라를 빌려서 카메라를 들고 나가보았다. 다시는 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사진 찍기, 자연으로 여행, 그리고 아빠와의 여행. 그것들은 아빠와 주말에 잠깐 가까운 호수공원으로 나간 산책으로 다시 돌아와 어느 순간 내 유일한 삶의 낙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평일에 공부를 하다가 잠깐 쉴 겸으로 친구들과 영화보기 못지않게 아빠와의 호수공원 산책이 기다려졌다.

        지난겨울, 공부에 지쳐서 털레털레 집에 와서 가방을 던져 놓고 책상에 앉았는데, 책상에 DSLR 카메라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빠와의 사진 산책을 기념하며’ 라고 아빠가 조그맣게 써놓은 쪽지가 놓여있었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세세한 카메라 매뉴얼을 다 볼 시간은 없었고, 그저 카메라 하나만 들고 주말에 가까운 호수공원으로 아빠와 산책을 나갔다. 그렇게 시작한 아빠와의 사진 산책. 이를 통해서 사진 기술 그 이상을 배우며 내 안에 조그마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201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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