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그래도 살아야지예~” 낙과 주우며 희망도 담아요 본문
가을 들녘에 시름이 깊다. 가장 길었던 장마와 연이은 태풍에 멍든 농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그 어느 해보다 맑고 푸르다. 두 차례 태풍이 지나간 후 사과농사를 짓는 지인을 찾아 경북 영주 안남마을로 가는 중이었다. 마을 들머리에 들어서니 늘 아름답던 가을 풍광은 찾아볼 수 없다. 매년 이맘때면 마을 입구부터 사과나무들이 크리스마스 트리같이 붉은 열매를 달고 한바탕 가을 축제를 벌이던 곳이다.
“하늘이 우리를 버린 기라예∼.”
25년째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노홍석(55) 씨가 낙과를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나무에 달려 있어야 할 붉은 사과들이 땅에서 뒹굴고 있었다. 가지에 듬성듬성 달려 있는 사과들도 생기가 없다. 소백산이 큰바람을 막아주고 맑은 날이 많아서 이곳 사과는 웬만한 태풍에도 끄떡없고 당도가 뛰어나기로 소문났다. 올해처럼 힘든 건 처음이라며 사과를 주워 담는 노 씨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하필이면 크고 좋은 것만 다 떨어져 더 속상하다.
태풍보다도 비가 더 문제였다. 50일가량 이어진 비로 일조량이 부족해지자 잎이 마르고 떨어졌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서 인력난이 심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력수급에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마을에서 한때 하루에 외국인 23명이 일을 했었는데 지금은 2명이 전부다. 그래도 자신은 젊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주위에 보면 안타까운 분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우얍니까, 그래도 살아야지예~.”
농부들은 하늘 보고 욕하지 않는데 올해는 하늘 보고 이삼백 번도 더 욕을 했다며 겸연쩍게 웃는다. 그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그저 묵묵히 듣는 것 말고는 달리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무엇이 가장 힘들었어요?”라고 물으니 농민들은 하늘이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막걸리 한잔하면 다 풀어진다며 환하게 웃는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던 노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년 봄, 사과나무를 돌보고 있을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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