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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장맛비가 숨고르기를 하는 사이 물방울이 맺힌 풀잎 위를 달팽이 한마리가 천천히 걸어갑니다. 너무 오래 걸린다고, 등에 짐이 무겁다고 투정하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갑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고 빨라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세상입니다. 잠시 달팽이의 발걸음에 호흡을 마쳐보며 그 느림의 여유를 즐겨봅니다.
장마가 시작되던 날, 나무 밑동 철사 줄에 앉아 참새들이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평소엔 조그만 먹을 것을 가지고도 아등바등 싸우던 녀석들입니다. 온몸이 젖고 날씨가 음산해지자 서로에게 기대며 추위와 배고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비 내리는 날 누군가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지는 건 비단 참새만은 아니겠지요. 서울숲
농부인 아버지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쇠비름. 예초기로 베어버리고 비닐을 덮어놓아도 며칠이면 온 밭을 뒤덮는 쇠비름을 보며 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 “허 고놈들 참 질기다!” 비가 와서 며칠째 작업을 쉬고 있는 공사장, 포클레인 위에 나란히 고개를 내민 쇠비름. 흙 한 줌 없는 쇠붙이에 발을 딛고 서서도 천진난만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나온 한마디, “허 고놈들 참 질기다!‘
물길 열려 바다로 일 나갔던 두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젊은 할머니는 양손에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앞장서고, 꼬부랑 할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부지런히 그 뒤를 따라갑니다. 갯것을 캐며 늙어가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입니다. 긴 여운을 남기며 그렇게 함께 걸어가는 발자국을 보면서, 반평생을 함께 하셨던 내 어머니와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억척스럽게 헤치고 온 두 여인의 고단한 삶이 연민과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2003/충남 태안
시간마저 정지한 듯 고요한 늪 둑을 걸어갈수록 팽팽한 고요 속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집니다. 생명의 수런거림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억겁의 세월을 살아 숨쉬어온 생명의 땅, 우포의 숨결입니다. 2003/창녕
무심히 지나치면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꽃입니다. 빛바랜 갈색 낙엽 틈에 피어난 파란 꽃이 하도 예뻐서 길을 가다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름을 몰라서 한참을 찾아보니 봄까치꽃(큰개불알풀)이었습니다. 고개를 들면 흐드러진 벚꽃이 분분히 하얀 꽃잎을 날립니다. 진달래, 개나리도 크고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리며 한바탕 꽃 잔치를 벌이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빛깔과 향기로 수줍게 피어나는 풀꽃들이 있기에 이 봄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2003/일산
‘빠앙~, 칙칙폭폭, 칙칙폭폭’ 세 칸짜리 기차가 선로 위를 미끄러지자 노란 꽃무리가 출렁입니다. 어릴 적 기찻길은 외부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의 대상이었지요. 그래서인지 기차는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어릴 적 잃어버린 꿈과 추억으로 다가옵니다. 오늘도 기차는 추억을 싣고 마음 속 고향으로 달려갑니다. 2005/전남 화순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면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빛깔과 향기로 피어올라 주위를 환하게 만드는, 그런 민들레 같은 그런 사람이 많은 세상이라면 참 좋겠습니다. 2004/일산
'워워-' 겨우내 묵혔던 땅을 갈아엎자 고개를 내밀던 쑥이며 냉이, 질경이 등이 화들짝 놀랍니다. 봄기운에 녹아들고 쟁기질에 한바탕 뒤집혀 으스러지면서 땅은 푸른 생명을 틔울 희망으로 가득 찹니다. 한줌 흙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살아 꿈틀대는 어느 봄날. 새삼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2002/홍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