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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봉미, 그 품에 안기다

빛으로 그린 세상 2017.07.07 15:06

- 경기도 양평 봉미산

 

휴대폰을 켜 둔 게 잘못이었을까. 일상을 떠나 찾아온 숲이었다. 번다한 일상일랑 잠시 접어두고 진초록 숲의 향기에 흠뻑 취하며 그렇게 몸도 마음도 쉬리라 생각했었다.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 남짓 달려왔는데 울창한 산림이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깊은 산그늘과 그윽한 숲 향기를 만끽하며 조금씩 자연에 동화되어 가는데 느닷없이 휴대폰이 울린다.

중학생 둘째 아이다. 동생을 혼자 두고 아침부터 친구들과 영화를 보겠다는 아이에게 벌컥 화를 내버렸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며칠 전부터 동생을 돌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자기 밖에 모를까. 잠시 밀쳐두었던 잡다한 일상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시험기간인 큰아이는 공부를 하고 있는지, 작은 아이는 컴퓨터게임을 너무 오래하는 건 아닌지, 안방 욕실에 새는 수도꼭지도 고쳐야하는데, 아참 세금 고지서는 어디 두었더라, 주말에 친정에 간다고 했는데 못 간다고 전화도 해야 되고……. 한번 밀려든 이런 생각들이 어느 틈엔가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차에서 내려 임도를 걷는다. 바닥의 돌멩이며 길섶에 핀 참나리, 팔랑거리는 노란 나비,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그 한적하고 고즈넉한 풍경들은 심란한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떠나와서도 일상의 걱정들을 두고 올 수는 없는 것일까. 애써 두고 오더라도 여행을 떠나면서 잠시 맡겨둔 짐처럼,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찾아서 부둥켜안고 가야할, 영원히 버릴 수 없는 짐 같은 것인가.

밖에서 바라본 산은 깊고 웅장했지만 숲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임도를 따라 산길을 오르다가 산음휴양림에서 봉미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발아래로 부드럽고 축축한 흙 기운이 느껴진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방으로 회갈색 참나무 줄기와 초록색 잎들이  눈앞 가득 펼쳐진다. 투박하면서도 고급스런 느낌의 굴참나무 수피는 만져보니 의외로 부드럽다. 꽃이 피었을 때에는 보지 못했던 철쭉의 나뭇가지는 사슴뿔처럼 수려하다. 여름 숲은 갈색 나무줄기와 초록색 무성한 잎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따따다다~” 굴참나무를 쪼는 딱따구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나무 뒤로 고개를 내미는 다람쥐를 보면서 계속 걷는데 의식적으로 털어내려는 마음 속 앙금이 자꾸 떠오른다. 아이와 다시 몇 차례 통화를 했다. 그냥 집에 있겠다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한풀 꺾여서 잔뜩 주눅이 들어있다. 화를 낸 게 미안하다. 친정에도 못 간다고 했다. 요즘 들어 친정어머니에게 무심했다. 너무 소원하게 지낸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얼마나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는가.  

땀이 흐르고 숨이 가쁘다. 산은 가파른 비탈도 험한 바위도 없이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주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무성한 활엽수림이 펼쳐 보이는 한결같은 모습에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진다.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점점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푸근하게 안아준다. 짓누르는 일상의 고민을 돌덩이처럼 질질 끌고 가는 내게 ‘그래, 너 많이 힘들었구나, 정말 많이 애썼구나!’ 하며 어깨를 가만 가만 토닥여준다.

멀리서 바라본 숲은 그 자리에 우뚝 서있지만, 땀을 흘리며 한걸음 한걸음 걸어 들어갔을 때 숲도 꼭 그 만큼 내게 가까이 왔다. 내가 마음을 열었을 때 숲은 팔을 벌려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그 품에 안겨 생각했다. 한꺼번에 뭉뚱그려 걱정만 할 때에는 너무 굳건해서 아무리 기를 써도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삶의 무게들, 하지만 힘들더라도 용기를 내고 그 문제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 들어갔을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화내서 미안하다고, 집에서 동생을 돌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이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친정어머니하고도 통화를 했다. 내가 못가는 대신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시기로 했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검고 보드라운 흙길을 맨발로 걷는다. 발아래 촘촘히 얽혀져 있을 나무의 뿌리들과 흙속에 살고 있을 수많은 생명체들을 가만히 발바닥으로 느껴본다. 아무리 보아도 질릴 것 같지 않은 초록빛 잎들은 햇빛과 방향에 따라 연초록으로 짙은 초록으로 시시때때로 변하고, 우뚝 솟은 나무들은 늘 그 자리에서 따뜻하게 바라보며 서있다. 안아주는 숲, 품어주는 숲, 어루만져 주는 숲, 그렇게 큰언니 같은 봉미산은 산 아래까지 따라 나와,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다독거려준다. 집에 다시 가져가야 할 일상의 짐이 가뿐하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용기를 준 봉미산에게 나는 무엇을 갚아야 할까. 봉미산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가는 수밖에…….

 

찾아 가는 길
경기도 가평군과 양평군에 걸쳐 있는 봉미산(856m)은 강원도 홍천에 가까워 경기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산이다. 봉미산으로 가려면 산음자연휴양림에서 연결된 등산로를 이용하면 된다. 산음자연휴양림으로 가려면 서울에서 6번 국도를 이용하여 양평, 용문터널을 지나 단월, 백동방면으로 진입한다. 산음1리 마을입구에서 좌회전하면 산음자연휴양림 표지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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