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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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한가운데 떠있는 푸른 섬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6. 24. 07:31

- 서울 중구 남산

성큼 봄이 다가왔건만, 도시는 아직 회색 겨울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숲은 스산하기조차 하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화사한 옷차림에서 봄을 느낄 뿐, 줄지어선 빌딩도 늘어선 자동차도 계절을 잊은 듯 무표정한 모습이다. 

 

장충동 국립극장 쪽으로 접어들자, 순식간에 숲이 펼쳐진다. 답답하고 혼탁했던 공기도 한결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남산으로 오르는 한적한 길가에는 뜩 물이 오른 개나리 가지마다 꽃봉오리들이 부풀어 오르고, 참나무 숲 아래 쌓인 낙엽 사이로 풀들이 푸릇푸릇하다.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을 하는 노부부나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에게서도 봄기운이 느껴진다. 자연은 그런 것일까. 삭막한 도시에서 잔뜩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남쪽 산자락은 온통 소나무 숲이다. 그렇게 남산을 왔어도 정작 남산 소나무 숲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그렇게 철갑을 두른 듯 당당하고 우람한 소나무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볼품없이 휘어지고 뒤틀린 남산의 소나무들이 더 친근하고 애틋하다. 결코 편치 않았을 세상살이가 우리네 고단한 인생살이를 보는 듯해서일 터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남산에 소나무 수십만 그루가 빽빽했다고 한다. 조선 태종 때 남산에 장정 3000명을 동원해 소나무 100만 그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소나무를 베어가는 자는 엄하게 다스렸다. 이토록 남산 소나무를 각별히 보호한 이유는 남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수도 한양의 안산(案山)이기 때문이다. 한양을 감싸 안은 남산이 푸르러야 왕조가 태평하다는 믿음으로 왕조의 엄격한 보호를 받은 소나무는 철갑을 두른 듯 씩씩한 기상을 가진 ‘남산위의 저 소나무’로 존재할 수 있었다.

일제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소나무 숲은 황폐해졌고 극심한 수탈 속에 지금처럼 비틀린 나무만 남게 되었다. 이런 남산의 소나무 숲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7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입산을 통제하고 소나무 2만여 그루를 심고 가꾸어 온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남산 소나무 숲 네 곳을 소나무 집단 보존림으로 지정해 집중 관리하고 있으며, 관찰로를 만들어 견학과 학습 장소도 제공하고 있다. 못생기고 뒤틀렸어도 여전히 ‘남산위의 저 소나무’들은 남산을 지켜오고 있다. 철갑은 빈약하더라도 남산 소나무숲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리라.

남산타워로 올라가는 길에는 수백 년 된 듯 우람한 나무들이 눈에 띈다. 한 자리에 버티고 서서 오랜 세월 풍상을 견디어 온 나무들은 남산의 살아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북소리가 들려온다. 봉수대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네 곳 중 한 곳에서만 피어오르는 연기는 아무 일이 없이 태평하다는 신호이다. 조선시대 불과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행사를 통해 이제 관광객들에게 역사와 문화의 향취를 전해주고 있다. 

어린시절 추억이 깃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면서 몰라보게 바뀐 도시의 빌딩숲을 바라본다. 남산은 거대한 콘크리트의 바다 위에 떠있는 푸른 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이라는 초대형 도시가 뿜어내는 매연과 공해로 남산 숲이 생기를 잃어가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래도 남산은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동물과 곤충이 뛰노는 생명의 공간이자, 지치고 고단한 시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벤치에 앉아 비둘기 먹이를 주는 노인들의 등 위로 노란 봄 햇살이 쏟아진다. 비둘기들이 계속 몰려오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까지 몰려와 좋아한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비둘기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노인과 아이들 평화롭다. 또 한쪽에서는 야외 운동기구로 운동을 하는 아이와 아빠의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가장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서 조금만 가면 그 곳에는 남산이 있다. 숲이 있고 나무가 있고 공원이 있다. 주변의 직장인들이 점심식사를 한 후 한가롭게 산책할 수 있고 인근 주민들이 아침저녁 가벼운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곳, 그리고 주말에는 가족단위로 아이들 손을 잡고 노랗게 피어나는 개나리를 보며 봄을 만끽하고, ‘남산위에 저 소나무’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곳, 생태와 역사와 문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남산은 그래서 서울 시민들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하다.

‘남산제모습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일제로부터 훼손된 지형이 복구되고 야외식물원, 야생화마을, 한옥마을 등이 조성되면서 남산은 거듭나고 있다. 이제 남산은 도시 한 가운데 고립된 섬, 마지막 보루가 아니라 청계천의 맑은 물과 용산공원의 싱그러움으로 연결되면서 온 도시를 초록으로 물들이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 도시의 푸른 꿈은 그렇게 계속 되고 있다. 

찾아가는 길
도심의 푸름을 간직하고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남산으로 가려면 3,4호선 충무로역 2,4번 출구나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나와 남산 순환버스 02번을 타면 된다. 한옥마을과 서울타워 남산도서관, 안중근의사 기념관들을 두루 거쳐 간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남산공원 홈페이지 parks.seoul.go.kr을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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