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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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그들이 살고 있었네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22:02

- 인천시 옹진군 굴업도에서

여행은 낯설음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기꺼이 낯설음을 만나고
그  낯설음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나는…….

 

 갈아타는 불편함과 맞바꾼 호젓함이랄까. 인천항에서 경쾌하게 달리는 쾌속선을 타고 덕적도로 향할 때만 해도 수선스러움과 설렘이 있었다. 덕적도에서 완행여객선으로 갈아타면서 소란스러움도 북적거림도 망망한 바다 속으로 차츰 가라앉았다. 검게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들, 뱃전에 놓인 올망졸망 보따리들……, 하루에 한 번 주위의 고만고만한 섬들을 차례로 들르는 해양호는 한적한 시골 완행버스를 닮아 있었다.

 

 섬은 고요하다 못해 차라리 적막하다. 드넓은 백사장은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바다 물결과 종종거리는 몇 마리 새들 차지이다. 가만히 다가가보니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 2급이라는 검은머리물떼새이다. 자신이 세계적으로 만 여 마리밖에 없는 희귀 새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인기척에도 아랑곳없이 파도가 밀려간 모래밭에 앙증맞은 발자국을 꾹꾹 찍는다.

 하필이면 모래에서 살아야하는 운명이라니, 모래 언덕에는 갯메꽃과 보리 모양의 통보리사초들이 푸릇푸릇하다. 바람에 모래가 날리고 물도 모두 빠져버릴 텐데……, 안타까운 마음에 줄기를 흔들어보니 꼼짝도 하질 않는다. 모래에 든든하게 뿌리박은 보리사초는 오히려 천진하게 웃는다. 풍요로우면 풍요로운 대로 척박하면 척박한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며.

 가쁜 숨을 내쉬며 도착한 개머리억새군락지에는 확 트인 초원이 펼쳐진다. 바다 쪽으로는 깎아지른 바위 벼랑이다. 인기척에 놀란 사슴 서너 마리가 도망가고 위태로운 암벽 사이로 흑염소가 뛰어다닌다. 검은머리물떼새, 두루미천남성, 갯방풍 등 모두 멸종 위기의 희귀하다는 동식물들이 섬 곳곳에서 지천으로 보이는 것도 희귀한 노릇인데, 눈앞에서 뛰어다니는 야생의 사슴 떼라니…….

바다로 지는 해를 보기 위해 바위에 걸터앉으려는데 온통 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염소똥투성이다. 제대로 길이 나 있지 않아 풀숲을 헤치고, 콩자반 같은 염소똥 사이에 앉으면서 드는 느낌, 그것은 낯설음이었다. 그동안 등산로와 잘 꾸며진 산책로와 각종 편의시설에 얼마나 익숙해있었던가. 해는 바다 위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어둑해지는 초원을 돌아 나오려는데 길마저 보이지 않았다. 낯설음은 곧 두려움으로 밀려왔다.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었다.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없어지고 다시 눈을 뜨면 세상이 순식간에 생겨난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마찬가지일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동했지만, 나도 모르게 자기중심적으로 자연을 바라보지는 않았던가. 자연은 사람들에게 멋진 풍경을 주고 휴식을 주고 먹을거리를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결국 나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수한 풀을 등산화로 짓밟고 평화롭게 노니는 사슴과 염소들을 놀라게 한 무례한 손님이었던 것을.

주민 수가 적다는 이유로 핵폐기장이 될 뻔했던 굴업도에 이제는 세련된 리조트와 골프장을 짓겠다는 대기업의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다. 섬에 사는 사람이라야 여덟 가구에 열 명 남짓하지만, 사람들보다 더 많은 새들과 사슴과 염소와 아주 더 많은 풀과 나무들이 살고 있는 곳, 한때는 주민들이 키웠던 흑염소와 꽃사슴도 산으로 올라가 야생의 무리가 된지 오래고, 옛 마을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전봇대조차 반쯤 모래에 덮여 자연의 일부로 되어가는 곳, 이곳이야말로 섬의 다른 동식물처럼 멸종 위기의 희귀하고 보존되어야 할 자연의 마지막 보루가 아닐까.

이른 아침, 백사장에는 나뭇잎 같은 새 발자국과 인근에 물을 먹으러 온 사슴 발자국이 무수하다.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백사장을 걷는다. 발아래 눌려지는 모래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검은머리물떼새 너덧 마리가 종종거린다. 모래언덕의 둥지에 알을 낳고는 사람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끌려고 애를 쓴다. 초조해하는 어미새가 마음에 쓰여 가던 발길을 되돌린다. ‘꿋꿋하게 살아가거라, 터전을 지키며 오래도록 살아가거라’, 되돌아가는 길, 모래밭에는 동물들의 발자국과 내가 걸어 온 발자국이 제법 어울리는 듯하다.


글. 최경애(수필가)  사진. 김선규(생명다큐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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