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자료실/아빠와 아들의 사진산책 (23)
빛으로 그린 세상
산책하다 힘들면 벤치에 앉아 그저 주변을 바라보는 거다. 어느 순간 느긋하게 바라보던 풍광이 내마음속에 들어온다. 그 순간 내마음과 풍광이 하나가 된다.
집 베란다에서 호수로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들이다. 특별히 계획을 세워 찍은 것은 아니고 그저 호수로 풍광을 바라보다 마음이 갈 때 마다 한 컷씩 찍은 것을 모으니 ‘호수로 4계’란 작품이 나왔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대상을 시간의 간격을 두고 촬영하는 것을 정점(定點)촬영이라고 한다. 테크닉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그저 마음가는 대상을 접할 때 마다 한컷 두컷 누르다 보면 어느새 퍼즐을 맞추듯 훌륭한 그림이 그려진다. 사람의 성장을 찍은 다큐멘터리도 넓은 의미에서 정점 촬영이라고 볼 수 있다.
참 신기 했다. 아빠와 얼굴을 맞대고 지긋하게 인생에 대해 상담한 것도 아니었고, 훈계를 들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서로 좋아하는 산책과 자연, 그리고 사진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무작정 나가서 같은 곳에서 같은 것을 같이 바라보며 사진을 찍은 것이 전부였다. 아빠가 말했던 “사진은 마음을 담는 것”이라는 말처럼 아빠와 사진을 찍으면서 마음이 통한 것이었을까? 처음에는 별 다른 일 없으면 정적만 흘렀던 산책길이 이제는 아빠에게 숨길 것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털어 놓느라 시끄러운 산책길이 되었고, 아빠도 사진을 알려주며 아빠 이야기를 서슴없이 해주셨다. 똑같은 풍경을 찍은 것임에도 전혀 다른 사진이 나오는 것을 보며 단순히 카메라 성능 차이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아빠와 나와의 가치관, 하고..
초롱초롱한 두 눈이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얼굴과 몸짓이 닮은 아빠와 아들이다. 잠시 뒤 귀에 익숙한 “땡”하는 전자레인지 벨소리가 정막을 깨트림과 동시에 두 사람은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자, 먹자”라며 같은 동작으로 신나게 합창을 한다. 요즘 인기 있는 개그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뚱보 아빠와 아들이 먹을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웃음이 빵 터진다. 다른 것은 몰라도 두 사람은 적어도 먹을 것에 대해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한 마디로 소통이 되고 있다. 내겐 아들이 셋 있다. 큰 아이는 대학교 2학년. 가끔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해야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바쁘다. 아빠와 함께 산책도 하고 놀이도 하던 막내아들도 봄날 지나가듯 훌쩍 커버려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다. 질풍..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혔다. 밤새 내린 눈이 모든 걸 뒤 덮었다. 베란다로 내다 본 세상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경계로 하늘색과 하얀색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니 잠시동안 입시로 바쁘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해 지는 듯 했고, 한동안 책상에만 놓여있던 카메라를 꺼내들고 아빠를 깨웠다. 아빠와 함께 하는 올해 마지막 사진 산책을 나섰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이른 아침 산책길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고, 내가 내 딛는 한발, 한발이 연신 발자국을 만들어 냈다.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혀 있었다. 늘상 보던 눈, 늘상 보던 광경들이였지만, 이렇게 일찍 나와서 밤새 내린 눈이 모든 것을 덮은 광경을 본 것은 처음이였고, 신비로웠다. 그리고 그 신비한 모습들을 사진으로 더 ..
-하늘은 넓었다. 드디어 수시 합격자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가슴조리며 컴퓨터를 켰지만 선뜻 열어볼 수 가 없었다. 잠시 후 병원에서 공익근무를 하는 형에게서 문자가 왔다. “ ㅠㅠ”. 형도 기대가 되었는지, 먼저 결과를 확인하고 내게 통보를 해주었다. 믿기지 않아서 나는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교무실로 찾아갔다. 선생님들은 모두 모여서 나에게 웃으시며 “더 좋은데 가야지~” 라고 달래주셨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았지만 기대가 컸기에 그에 따른 실망도 컸다. 납득할 수 없는, 외면해버리고 싶은 현실이 나를 괴롭혔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엄마에게 전화를 해 엄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침 하늘에서 비가 주륵주륵 내렸다. 나는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자전거를 ..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어김없이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애타게 엄마를 찾는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에 내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장정 4명이나 있는 우리 집에 왠 아기 울음소리? 혹시 늦둥이? 애석하게도 계속 들려온 우는 소리는 다름 아닌 길냥이들이 밖에서 내는 소리였다. 길냥이는 길거리의 ‘길’과 고양이의 애칭인 ‘냥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하지만 그 귀여운 억양과는 반대로, ‘길냥이’는 아주 가슴 아픈 뜻이 있는 단어이다. 집에서 길러지다가 이사, 정리 등의 이유로 밖에 버려진 고양이들을 길냥이라고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모든 동물을 ‘he’나 ‘she’가 아닌 ‘it’으로 표현을 한다. 이는 물건을 지칭하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기르던 고양이를 불쌍한 길냥..
시험을 망쳤다. 내가 자신 있어 하던 사회 과목이었지만, 답은 신기하게 내가 찍은 선택지만 빗겨 나갔다. 평소에도 시험을 망친 적은 꽤 있었지만, 그때는 친구들과 웃어 넘기고 금새 극복하던 나였지만, 유달리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자신 있었던 사회 과목을 망치니 몹시 속상했다. 학교에서 채점을 하면서 시험지를 찢어버렸다. 아직 남은 시험을 위해 도서관을 가자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무작정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얼마 전 열심히 공들여 제출한 환경 독후감 결과 발표가 남아 있어서, 꿀꿀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내심 기대하며 나는 컴퓨터를 켰다. 수상자 명단을 찾아보고 다시 찾아봐도 내 이름 석자는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았다. 이 또한 역시 평소 같았으면 “에잉, 다음에 도전하지 뭐” 라며 쿨하게 ..
준우야 시험 공부하느라 무척 바쁘지. 그 바쁜 와중에도 아빠와 하는 사진산책이 너에게 활력을 주는 것 같아 무척 기쁘단다. 물론 준우와 함께하는 사진산책이 아빠의 삶속에도 쉼표를 주고 있단다. 아빠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느꼈겠지만 사진과 산책은 참으로 많이 닮은 것 같아. 산책에서 즐거움과 사진의 즐거움이 같은 점이 많거든 너에게 사진을 가르켜 주면서 아빠의 첫째 원칙은 ‘사진찍기는 즐거운 놀이’라는 것이지. 준우가 어렸을 때 아빠 카메라를 가지고 아빠 흉내를 내며 놀 때의 그 즐거운 마음을 잃지 않게. 아빠가 처음 사진을 배울 때에는 너무 교과서적으로 원칙을 쫒다 보니 정작 사진이 주는 즐거움과 재미를 잃어버린 곤 했지. 노출, 조리개, 셔터스피드, 피사계심도등등 이런 복잡한 사진촬영 형식들은 다 내려..
나는 산책을 하면서 멋있는 나무가 보이거나, 예쁜 꽃들, 간혹 처음 보는 것들과 조우하면 습관적으로 셔터를 눌러 사진으로 간직하고, 그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데에 그쳤다. 이번 산책에도 어김없이 반사적으로 셔터로 손가락을 옮길 뿐, 내가 무엇을 찍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아했다. 나는 그저 아빠가 찍었던 정말 예쁜 꽃들과 멋진 자연의 풍경을 아빠 못지 않게 찍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그저 ‘웅장한 나무’, ‘예쁜 꽃’을 찍는 행위를 반복한 다는 것을 눈치를 채셨는지, 아빠가 갑자기 꽃과 나무들을 손가락으로 가르키시며 그들의 이름을 물어보셨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것이 없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름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