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삶의 원형을 찾아서 (102)
빛으로 그린 세상
- 경기 양평군 지평면 풀꽃나라에서 들판에는 풀꽃이 피어나고 밤에는 반딧불이가 불을 밝히는 이곳에서, 그는 어린 친구들과 함께 꽃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무에 귀 기울이고 바람과 노는 풀꽃나라의 고라니입니다. #풀과 나무와 아이들이 주인인 세상 산봉우리에 구름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비가 그친 후 창밖으로 보이는 숲과 들판이 더욱 싱그럽다. 도망치듯 일상을 훌쩍 떠나온 길이다. 벼가 쑥쑥 자란 푸른 논과 잎이 무성한 고추밭 콩밭이 펼쳐지는 시골길을 얼마나 달렸던 것일까. 아득히 보이던 기찻길과 나란히 달리다 헤어지다 하다가 문득 기찻길 아래 터널을 만났다. 마치 사람이 사는 세상과 단절된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인양, 그곳에서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비밀의 문을 열 듯 터널을 조심스레 들어갔다. 터..
- 강원 평창군 봉평면 흥정계곡에서 “뚝딱뚝딱” “토닥토닥” 작업실에서는 남자의 망치소리가 들려오고 집안에서는 음악 소리와 밥 짓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강원도 조그마한 산골에서 새집목수와 봉평댁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새집이 있는 풍경 계곡으로 가는 길은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싱그러운 신록과 청량한 계곡을 찾고 싶은 건 누구나 같은 심정이겠지요. 모처럼의 휴일, 계곡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도 짙은 숲 향기와 계곡의 바람 냄새가 스며듭니다. 흥정계곡의 농원 한편에 있는 어느 집이었습니다. 난간위에도 근처의 나무 위에도 여러 가지 모양의 수많은 새집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늘을 뒤덮은 나뭇잎, 숲과 어우러지는 나무집, 그리고 독특한 모양의 수많은 새집들로, 그곳은 마치 동화 속 나라인 듯 했습..
- 경남 산청군 대포마을에서 “찰칵” 온 가족이 카메라를 보며 모처럼 웃는 순간, 마당에 핀 꽃보다 지리산의 신록보다 이 순간 가족의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밥상에서 만난 지리산의 봄 지리산의 봄은 더디게 찾아옵니다. 마을을 굽어보는 산등성이들은 이제야 봄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오래된 고목에도 갓난아기 같은 새싹들이 돋아납니다. 잦은 비와 뒤늦은 추위 끝에 느닷없이 다가왔던 도시의 봄과는 달리 천천히 음미하듯 이곳의 봄은 느리기만 합니다. 마을의 어느 골목 끝에서 한 집을 만납니다. 뒤늦게 핀 동백꽃이 툭툭 떨어진 마당 한편에는 아이들 자전거와 울긋불긋한 장난감들이 널려있습니다. 정재진(73)씨 댁입니다. “어여 오이소, 배고프지예..” 부엌에는 점심 준비가 한창입니다. 금방 뜯은 싱싱한 나물..
- 경기 용인 한택식물원에서 가장 작은 존재를 사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경제논리와 개발 논리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지요. 하필이면 남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풀꽃들에 그는 젊음과 열정을 바쳤습니다. 오직 ‘제대로 된’ 식물원을 만드는 꿈을 가슴 가득 품은 채로요. 이제 우리 땅의 이름 모를 풀꽃들은 그로 인해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내세우지 않고 드러내려하지 않는 그들을 보며, 어떤 이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음에 새기고, 자연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그들을 보며 어떤 이는 자신의 이웃을 돌아봅니다. 작은 생명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렇게 홀씨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멀리 퍼져갑니다. #보여주지 않는 식물원? 모처럼 화창한 봄날, 바람 꼬리가 매섭다...
-거제시 일운면 공곶이농원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는 남해의 푸른 바람과 싱싱한 햇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기록적인 추위가 몰아닥치기도 했고 가뭄에 목이 타기도 했지요. 그럴수록 나무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40년이 지난 후, 황량했던 언덕은 겨울에도 짙푸른 숲이 되었습니다. 붉은 동백과 수줍은 매화가 얼굴을 내밀고 새가 날아듭니다. 40년 세월을 한결같이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노부부, 그들이야말로 이곳을 지키는 뿌리 깊은 나무입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달큼하다. 봄 향기일까. 한반도 끝자락에 있는 거제의 바람에는 엷은 소금냄새와 희미한 꽃냄새가 스며있다. 예구마을에 차를 세웠다.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 한 떼의 갈매기들이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물비늘을 한가..
- 경기 안성시 죽산면 구메농사마을에서 겨울이면 하루도 쉬지 않고 복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잘 때까지 식사하는 시간을 빼고는 조리 만드는 일에 하루를 쏟는다. 이곳에서 시간은 극도로 단순해진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복조리 개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마을로 시집와서 처음 조리 만드는 것을 배웠던 할머니들은 할머니의 시어머니가 그랬고 그 시어머니의 시어머니가 그랬듯이 반백년의 세월이 넘도록 겨울이면 복조리를 만든다. 곱던 새색시 손은 주름지고 거칠어졌지만 그 손은 지금도 여전히 복을 엮는다. 겨울 풍경은 어디나 황량하다. 텅 빈 들판에는 말라 비틀어진 풀들만 남아 있고 인적이 뜸한 마을 골목에는 찬바람이 불어온다. 어느 건물 앞에 털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방문을 열자 축축한 대나..
- 경남 사천시 삼천포항에서 하늘이 푸르스름하다. 해 뜨기 한 시간 전, 길을 나섰다. 눈앞에 보이는 바다는 아직 검푸른 어둠 속에 잠겨있다. 거리도 잠에서 깨지 않은 듯, 밤새 휘청거렸던 횟집 간판의 불빛도 사람들의 술렁거림도 자취를 감추고 정적만 감돈다. 그렇게 하늘도 바다도 사람들도 모두 잠든 거리를 지나다가, 문득 환한 불빛과 마주했다. 이곳은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것일까. 양옆으로 길게 펼쳐진 좌판과 그 사이로 북적이는 사람들, 물건을 사라고 목청을 높이고 시끌벅적 흥정하는 소리들……. 그곳에선 싱싱한 활기가 어둠을 비치는 환한 불빛처럼 주위에 퍼져 나갔다. 삼천포어시장이다. 항구로 가는 골목에 들어서자 본격적인 활어 난전이 펼쳐진다. 끝없이 늘어선 빨간 고무대야에는 바닷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그 ..
- 한라산 윗새오름에서 구름 바다 위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드러난다. 온 세상이 구름과 안개에 잠겨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 광경이 내게는 신의 계시나 불변의 진리처럼 다가왔다. 안개가 자욱하다. 차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을 달린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또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채 꿈속을 헤매는 느낌이다. 그 언젠가 끝없는 안개 속을 홀로 걸어가는 꿈을 꾸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뿐, 나는 안개의 바다에 휩싸인 고독한 섬이었다. 그 섬에는 내 목소리만이 외로운 독백이 되어 울려 퍼졌었다. 이른 아침,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그렇게 나는 안개 속을 헤매었다. 하늘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공항 대합실..
- 강원도 양양 미천골에서 그해 가을, 창밖에는 당단풍나무가 유난히 붉게 타올랐다. 어쩌자고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세상에,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단풍에 나는 그 가을 내내 화를 냈다. 어딜 둘러보아도 온통 화사한 단풍이다. 물소리는 쉼 없이 들려오고 울긋불긋한 나뭇잎들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휴대폰도 안 터지는 첩첩산중, 고개를 들면 곱게 물든 산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먼 산일수록 타오르는 단풍이 더욱 그윽해진다. 몇 해 동안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단풍의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보상이라도 받는 것일까. 나는 강원도의 숨겨놓은 오지에서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가을의 향연 앞에 서있다.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에 숨어있는 원시림, 미천골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요즈음, 도시의 거리에도..
-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에서 제주의 억새들이 척박한 땅에서 세찬 바닷바람에 흔들린다면 이곳의 억새들은 도심의 한가운데 쓰레기더미 위에서 그리움에 흔들리며 살아간다. 산다는 건 끊임없이 고비를 넘는 거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매일 주어진 일과 해야 할 일을 장애물처럼 넘고 나면 또 다음 일이 줄을 선다. 그렇게 허둥대며 살다가, 문득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정수리부터 물들어 가는 길가의 나무들이 눈에 가득 빨려 들어왔다. 어느덧 성큼 다가온 가을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문 밖을 나오면 여행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월드컵공원 순환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그렇게 하늘과 노을을 찾아가는 가을 여행을 시작했다. 유난히 맑고 푸른 하늘이 만져질 듯 성큼 다가서 있다. 도심에서 하늘을 가까이 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