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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밤 10시, 서울 을지로 한복판.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자 신세계가 펼쳐진다. 코로나 시대 같았더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풍경이다. 얼굴 마주 보며 먹는 음식, 술 한 잔…. 너무도 당연했던 일상들이 새삼 감동으로 와 닿는다. 아버지 세대들이 고단한 하루의 삶을 풀어냈던 그 자리를 지금은 스마트폰 세대들이 대신하고 있다. 잔과 잔이 부딪치며 웃음소리가 커져 간다. 누군가 건배제안을 하면 다 같이 잔을 부딪치며 합창이라도 할 것 같다. 어느덧 나도, 이 후끈한 분위기 속에 스며들어 근심 잊고 시원한 생맥주 사이를 유영하는 한 마리 노가리가 되었다. ■ 촬영노트 일명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1970년대 주머니 가벼운 인쇄노동자, 건축자재 공구상들의 하루 피로를 달래 줬던 곳이었다, 당시 맥주 500㏄에 ..
수국, 수련, 원추리… 서울역 고가공원에 여름 꽃들이 활짝 피었다. 하늘에는 비를 잔뜩 머금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땅에는 장난감 같은 차량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고가공원에서 제일 높은 수국전망대에 오르자 소담스러운 수국들이 활짝 웃으며 반긴다. 토양성분으로 색이 변하는 수국들이 발밑을 오가는 버스들처럼 붉고 파랗게 물들어 가고 있다. 후두두둑 빗방울이 떨어지자 고가공원 여름 꽃들이 기지개를 활짝 켜고 생기를 되찾는다. 도로에서 공원으로 변신하여 다섯 번째 여름을 맞이하는 서울역 고가공원에 여름이 익어가고 있다. ■촬영노트 ‘서울로 7017’은 서울역을 중심으로 동서부를 이어주는 고가도로였으나 안전등급d를 받고 철거 위기에 놓였다. 여러 논의 끝에 철거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다니는 공중공..
오랫동안 새벽 출근을 하다 보니 아침밥을 거를 때가 많다. 일터로 허겁지겁 가는 대로변 가로수에 흰 눈이 소복이 내린 듯 새하얀 꽃들이 만개했다.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 꽃이다. 밤새 숙취와 허기로 배 속이 요란하다. 차는 막혀 꼼짝을 안 하고 멍하니 이팝나무 꽃을 바라보며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5월은 보릿고개가 절정이었다. 식구는 많았고 먹을 것은 귀했다. 허기는 늘 공기처럼 친근했고 흰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 꽃을 보기만 해도 배 속이 요란해졌다. 누군가에는 아름다운 꽃으로 누군가에는 아련한 추억 속으로 출근길 이팝나무 꽃이 수많은 사연을 안고 무성히도 피었다. ■ 촬영노트 요즘 전국을 흰 물결로 수놓은 나무가 이팝나무와 아까시나무다. 나무 꽃이 밥알(이밥)을 닮았다고 부른 이팝나무는 예로부터 꽃이 많..
키다리 나무들이 형형색색의 뜨개옷을 입고 있다. 찬바람이 불고 거리에는 낙엽이 뒹구는 쓸쓸한 계절이지만 가로수들이 알록달록 옷을 입고 있는 경기 과천시 문원동 도로는 나무들의 축제가 벌어진 듯하다. “너무 예뻐요.” 30년 경력의 야쿠르트 아줌마 이영옥(70) 씨가 이곳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며 환한 표정을 짓는다. 분홍색 옷을 입고 일하는 모습이 나무들이 입은 뜨개옷과 잘 어울린다. 나무들이 입고 있는 옷을 만져보니 한 코 한 코 정성껏 뜨개질한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작은 정성들이 연결돼 나무가 따뜻해지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훈훈해졌나 보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에 겨울나무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 촬영노트 뜨개질로 나무에 옷을 입히는 ‘트리니팅(trees knitti..
파란 하늘아래 미루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산책길을 따라 심어진 스크렁들은 바람결에 덩실덩실 춤을 춘다. 서울 이촌한강공원 풍경이다. 어깨동무 하며 그 길을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아슴아슴 추억이 떠오른다. 아마도 이 아이들만 한 때 였나보다. 할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아오던 길에는 논두렁을 따라 키 큰 미루나무들이 있었다. 더운 여름날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면서 몰래 맛보던 그 막걸리 맛이 얼마나 맛있던지... 그 달콤했던 유년의 추억에 동요 한 자락이 입안에서 맴돌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 있네.....’ 서울시는 2017년부터 한강 동서를 잇는 약 40km 길이의 ‘미루나무 백리길’을 조성했다. 시원하게 뻗은 미루나무 길을 걷다보면 추억의 한 자락을 길어 올릴 수 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한 택배노동자가 차량에서 배달할 물건을 내리고 있다. 코로나19로 택배 물량이 늘어난 데다 추석을 앞둔 때라 아직 배달하지 못한 물건이 빼곡히 쌓여 있다. 누구든 이 시간이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텐데…. 반갑지 않은 비마저 내려 일손이 더뎌 보인다. 집에 와보니 현관문 앞에 택배가 놓여 있다. 언제부턴가 문 앞에 놓인 택배를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택배 상자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편리함 뒤에 감춰진 소중한 노동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 촬영노트 우연히 마주한 풍경이 마음을 움직인다. 그 마음을 사진으로 담고 싶을 때 몸의 일부처럼 돼 버린 스마트폰이 그 소원을 해결해준다. 노출, 셔터 스피드, 감도, 초점 등 알아서 계산해 순..
아이들이 계단 위까지 뜀박질을 합니다. 먼저 올라간 아이는 신이나 만세를 부르고 뒤따라온 아이는 부지런히 계단을 오릅니다. 그러건 말든 다른 아이는 줄넘기로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합니다. 어른들은 돌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아이들은 이제야 제 세상을 만난 듯 신이 났습니다. 푹푹 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코로나의 기세는 겪일 줄 모릅니다. 숨막히는 일상이 계속되지만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뭉게구름과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 모습이 지친 마음을 위로해 전해줍니다. ------------------- 배경과 대비되는 실루엣(그림자를 뜻하는 프랑스 용어)사진은 잘 사용하면 시선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빛의 반대편은 다 까맣게 표현되기 때문에 사람의 경우 배경 속에서 더 도드라져 작게 보이는 피사체라도 눈을..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른 후 차분해진 도심에 풍경 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대형서점 앞 벤치에 한 노신사가 동상 옆에 같은 모습으로 앉아 책을 보고 있다. 그 모습에 반해 가던 길을 멈추고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아 기웃거려보니 노신사가 형광펜으로 책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공 중이다. “책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요.” 전직 공무원인 서춘근(69) 씨는 나이제한이 없는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수줍게 웃는다. 서점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면서 짬을 내 책을 보고 있는 중이다. 새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 난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서 씨의 모습이 6월의 신록처럼 싱그럽다. 촬영노트 아침, 저녁의 햇살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빛이 품고 있는 색온도가 분위기를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