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그리움에 흔들리며 본문

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그리움에 흔들리며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22:43

-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에서

제주의 억새들이
척박한 땅에서 세찬 바닷바람에 흔들린다면
이곳의 억새들은
도심의 한가운데 쓰레기더미 위에서
그리움에 흔들리며 살아간다.

 

산다는 건 끊임없이 고비를 넘는 거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매일 주어진 일과 해야 할 일을 장애물처럼 넘고 나면 또 다음 일이 줄을 선다. 그렇게 허둥대며 살다가, 문득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정수리부터 물들어 가는 길가의 나무들이 눈에 가득 빨려 들어왔다. 어느덧 성큼 다가온 가을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문 밖을 나오면 여행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월드컵공원 순환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그렇게 하늘과 노을을 찾아가는 가을 여행을 시작했다.

 

유난히 맑고 푸른 하늘이 만져질 듯 성큼 다가서 있다. 도심에서 하늘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 하늘공원 정상이다. 하늘과 맞닿은 드넓은 초원에는 억새들의 은빛 물결이 출렁거린다.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는 억새의 몸짓에도, 돌아가는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에서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억새 사이로 난 길을 걷는 내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 위로 부스스 꽃을 피운 억새들이 바람에 일렁거리는 풍경은 아무리 보아도 좋다.

그곳에는 억새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억새 줄기 틈으로 노란 감국이 봉우리를 내밀고 시들어가는 개망초가 아직 화사하다. 분홍색 꽃을 피우는 ‘야고’도 보인다. 제주에서 억새를 가져올 때 씨가 함께 묻어와 이곳에 살게 되었다는 야고는 억새에 사는 기생식물이다. 제주가 고향인 야고는 아열대성 식물이라 서울의 추위에 견디기 힘든데도 땅속에서 쓰레기가 썩는 열이 올라와 가을에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한다. 야고가 생존하는 방식이 꿋꿋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억새 너머로는 북한산의 수려한 산세가 온전하게 드러난다. 유난히 맑은 날,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새삼 아름답다. 빼곡한 건물들이 북한산, 남산, 관악산 등에 둘러싸여 있고
가운데로는 한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이곳은 도시라는 바다에 떠있는 억새들의 섬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주의 억새들이 척박한 땅에서 세찬 바닷바람에 흔들린다면 이곳의 억새들은 도심의 한가운데 쓰레기더미 위에서 그리움에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런 억새들의 몸짓을 보며 슬프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은데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한다.

정든 고향을 떠나 화려한 도시의 부끄러운 뒷모습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이 어디 하나, 둘이랴. 두 주먹 불끈 쥐고 꿋꿋하게 살아내면서도 눈이 부시게 푸른 가을날이면 때로는 무너지는 마음도 마찬가지겠지. 그럴 때면 조바심치며 허둥대던 시간을 잠시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마음껏 흔들리리라. 알 수 없는 그리움도 세상에서 혼자라는 외로움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꺼내 놓으리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파란 하늘에 가만가만 울음을 풀어놓는 억새 곁에서 그렇게 나는 한없이 흔들렸다.

지는 오후의 햇살이 한층 부드럽다. 새로 생긴 순환버스를 타고 노을공원으로 향한다. 사람들로 북적대던 하늘공원과는 달리 해질 무렵 노을공원은 고요하다. 골프장에서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노을공원에는 드넓은 잔디밭이 골프장의 흔적을 보여줄 뿐, 새소리, 곤충소리, 그리고 내 발자국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린다. 어느덧 해는 산에 걸리고 붉은 기운이 감도는 하늘에는 구름이 검붉어진다. 발아래 잔잔히 흐르는 강물도 붉은 빛으로 빛나고 도시는 한층 차분해진다.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치유할 수 없는 상처처럼 끌어안고 있는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은 이제 도시의 바다에 떠 있는 푸른 섬이 되었다. 공원 곳곳에 있는 가스포집 시설을 통해 메탄가스를 처리해내고 쓰레기 썩는 물을 끊임없이 정화시켜야 하지만, 만져질 듯 가까운 하늘이 있고 억새들의 깊은 그리움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에 물든 도시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노을이 지고 부드러운 어둠이 내려앉는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공원을 내려가다가 길을 잃었다. 어두워지는 공원 풀숲에서 들리는 낯선 기척에 야생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인적도 없고 불빛도 없는 공원을 얼마나 헤매었을까. 저 멀리 보이는 세상의 불빛, 아직 푸르스름하게 노을의 기운이 남아있는 하늘 아래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반갑다.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세상의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글. 최경애(수필가)  사진. 김선규(생명다큐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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