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자연을 끌어안는 넓은 품 본문

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자연을 끌어안는 넓은 품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23:17

- 경기 용인 한택식물원에서

가장 작은 존재를 사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경제논리와 개발 논리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지요. 하필이면 남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풀꽃들에 그는 젊음과 열정을 바쳤습니다. 오직 ‘제대로 된’ 식물원을 만드는 꿈을 가슴 가득 품은 채로요. 이제 우리 땅의 이름 모를 풀꽃들은 그로 인해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내세우지 않고 드러내려하지 않는 그들을 보며, 어떤 이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음에 새기고, 자연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그들을 보며 어떤 이는 자신의 이웃을 돌아봅니다. 작은 생명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렇게 홀씨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멀리 퍼져갑니다.

 

#보여주지 않는 식물원?
모처럼 화창한 봄날, 바람 꼬리가 매섭다. 사방은 아직 회갈색의 황량한 풍경이다. 산수유나무가 꽃망울을 맺고 양지바른 비탈에 노란 복수초들이 피어 있지만 화사한 봄 풍경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다. 때 아닌 폭설과 황사로 올 봄이 유난히 더디게 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식물원은 한층 무르익은 봄기운이 물씬하리라 내심 기대했었다. 아쉬운 대로 발아래 낙엽사이를 훑고 나뭇가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내 눈은 봄의 흔적을 좇았다.

언뜻 보면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지만 풀과 나무들은 부지런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여린 잎들이 차가운 땅을 뚫고 삐죽삐죽 솟아오르고 나뭇가지 마다 깨알 같은 크기의 새싹들이 무수히 달려있었다. 낙엽 덤불 속에서 숨어 피어 있는 작은 풀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키 큰 나무 아래에 수줍게 꽃을 피운 노루귀가 찬바람에 부스스 솜털을 떨었다. 계곡 물소리가 울려 퍼지는 산비탈에는 변산바람꽃이 하얗게 미소 지었다. 한창 새싹이 올라오는 깽깽이풀들…….

크고 화려한 꽃들이 시선을 붙잡았으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 꽃들이었다. 애써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작은 꽃들을 보물찾기 하듯 발견했을 때의 재미도 쏠쏠했다. 한 뼘도 채 안될 작고 가녀린 꽃대로 이른 봄 언 땅을 뚫고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커다랗게 팻말을 놓고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었다면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에게 식물을 애써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었다.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지요. 식물을 사랑하고 잘 키우는 게 동물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연생태원에서 만난 한택식물원 이택주(70) 원장이 산비탈에 피어있는 변산바람꽃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30여년의 세월을 흔들림 없이 식물원을 가꾸고 지켜온 그의 모습에는 할아버지 같은 자상함과 부드러움이 배어 있다. 그가 식물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79년. 경제논리와 개발 논리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다.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나온 그가 들판을 밀어내고 산을 깎으며 건설업을 했더라면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우리 산 우리 강의 풀꽃들을 찾아 헤매었다.

고향 땅 용인에서 목축업을 하다가 실패하면서 버려둔 목장에 풀과 나무를 심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가 심은 풀과 나무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번번이 죽기 일쑤였다.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전문가도 만나기 힘들었고 식물의 생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식물원도 없었다. 정작 우리 고유의 풀과 나무가 없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는 모든 생명의 근본이 풀이라고 생각했고 근본에 충실한 ‘제대로 된’ 식물원을 만드는 꿈을 키웠다.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우리 땅에서 자라는 자생식물을 찾아서 가꾸고 지키는 일이었다. 가파른 절벽, 외딴 섬, 계곡, 강가, 해변가 등 우리 꽃과 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땀과 열정과 재산까지도 고스란히 바쳐온 세월이 24년이었다. 그렇게 이름 모를 풀꽃들은 그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존재로 되살아났다.
 
“어느 산이라고 해두지요, 양지바른 언덕에 숨어 있는 깽깽이풀 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다가가니 깽깽이풀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가 나중에는 무더기로 피어 있었지요. 산 속이라 해가 빨리 지는 데 등불을 한꺼번에 밝힌 듯 산 속이 환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키가 작은 봄꽃들이 씨앗을 퍼뜨리기 위한 방법으로 씨앗에 밀선(꿀)을 만든다고 한다. 개미들이 이 꿀을 먹기 위해 씨앗을 제 집으로 옮기는 데, 깽깽이풀이 일렬로 있는 것은 개미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 흘린 것이고 무더기로 있는 곳은 개미집이 있던 자리인 것이다. 꽃을 사랑한다는 것은 꽃뿐만 아니라 꽃을 피우고 살아가는 방식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존재 이유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
“식물의 생태를 알려면 적어도 일 년에 여덟 번은 같은 장소에 가봐야 됩니다. 평창에 있는 백석산에 갔을 때였습니다. 봄에 갔을 때에는 복수초 꽃밭이더니 그 다음에 가니까 현호색이 잔뜩 피어있더군요. 그렇게 갈 때마다 달랐어요. 가을에는 온통 억새풀밭이구요. 그래서 가로 세로 30센티미터만큼 뗏장을 떼어 와서 조사해보니까 거기에서만 무려 20여 가지 종이 나오더군요...” 그것은 자연의 섭리였다. 키 큰 나무와 키 작은 관목 그리고 다양한 풀들이 어우러질 때 가장 기름진 땅이 되고 수많은 곤충과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의 뜻에 충실히 따랐다. 식물원의 35개의 테마정원에는 각각 서식환경이 비슷하거나 어울려 자라나는 식물들이 함께 자라난다. 그중에서도 계곡물이 흐르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지는 생태식물원은 자연 그 자체이다. 인공적인 조경 관리 없이 습도 차광 통풍 등을 고려해서 환경에 맞게 천여 개의 자생식물종을 심어놓았다. 한택식물원은 관람객을 위한 식물원이 아니라 식물들을 위한 보금자리였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암석원 바위틈에는 높은 산에서 자라는 노루귀들이 분홍색 보라색의 앙증맞은 꽃을 피웠다. 그 곁에는 멸종위기 식물인 깽깽이풀이 한창 꽃대를 올리고 있다. 개나리 목련 벚꽃 등 크고 화려한 꽃들이 사람들 시선을 붙잡는 데 반해,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피어났다. 겨울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은 그 곳에서 애달픈 줄기를 내밀고 찬바람에 맞서며 꽃봉오리를 부풀렸을 그들은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로 피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남이 알아주길 바라고 크고 화려한 것만 좇았던 내게 그들의 존재감은 알 수 없는 뭉클함으로 남는다. 스스로 내세우지 않고 드러내려하지 않아도 자연의 조화 속에서 함께 공생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었다. 경제 원리와 성공신화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하찮아 보이고 보잘 것 없는 그 작은 존재들을 귀중히 여기고 그들에게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돈을 버는 것도 남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도 변함없이 작은 생명들을 사랑한 이택주 원장의 존재감이 점점 커져 산처럼 다가온다. 풀꽃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면서 자연에서 가장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그가 온전하게 생명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내가 가꾸는 우리 집 생명들을 떠올린다. 사내아이들이니까 개불알풀 정도로 해둘까. 자신이 어떤 꽃인지 알지 못한 채 화려한 장미를 부러워했던 내가 늦게나마 작은 풀꽃의 의미를 돌아본다지만, 아이들만큼은 아직도 크고 화려한 꽃이 되기를 꿈꾸는 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이 아이 안에 무슨 꽃이 들어 있고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 가장 잘 자라는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내가 원하는 꽃을 피우라고 닦달을 하지는 않았던가. 남이 보는 이미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으로 살면서 더불어 살 때 가장 빛이 나고 싱싱한 것을……. 요즘 들어 학교 공부에 학원공부에 시들어가는 막내 개불알풀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린다.


글 최경애 (수필가) / 사진 김선규 (생명다큐사진작가)


 

 

식물을 위한 식물원
- 한택식물원

1979년에 설립된 이래 다양한 식물종의 확보, 보호 및 대량 번식을 위해 노력해왔다. 한택식물원은 현재 20여만 평의 규모에 자생식물 2400여종과 외래식물 7300여종 등 총 9700여종의 식물자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식물원과 호주식물원을 포함하여 35개의 다양한 테마정원과 식물연구소까지 갖춘 국내 최대의 종합 식물원이다.

환경부 지정 ‘희귀 멸종위기 식물 서식지외 보전기관(2001)’으로 주왕산내의 둥근잎꿩의비름을 복원하는 등 자생식물 및 해외식물 유전자원 보전에 앞장서고 있으며, 작은노루오줌 등 신품종 개발과 식용 약용 식물 개발에 대한 연구에도 힘쓰고 있다. 또한 다양한 교육 및 체험활동을 통하여 살아있는 학습장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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