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자료실/고성 산불, 그 후 (14)
빛으로 그린 세상
2000년 봄 또다시 화마에 휩싸였던 산등성이 가운데는 맨살을 드러낸 채 흙먼지를 날려보내고 있었다. 삼포리 일대는 불난 자리에 거대한 골프장이 들어섰다. 두차례의 화마로 주민들의 큰 저항없이 무혈입성했다고 한다. 죽왕면 인정리와 구성리 국유림에 마련된 영구조사지는 인간의 손을 대지 않고 자연이 스스로 회복하기를 기다리는 곳이다. 이곳에는 굴참나무, 신갈나무, 물오리나무들이 서로 숲의 주인이 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몸을 숨길 만한 공간이 마련돼서인지 계곡 아래 개울가의 젖은 모래바닥에 고라니와 멧돼지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눈에 띄어 너무도 반가웠다. 개울에 발을 담그니 송사리떼가 발끝에 모여들었다. 이선녀 아주머니가 벌써 7순을 맞으셨다. 집에서 키우는 소가 40마리로 늘어나 ..
2003년 4월. 봄은 어김없이 고성땅에도 찾아왔다. 식목일을 하루 앞둔 4일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야산을 찾았다. 민통선과 가까운 이곳은 지난 2000년 화공작전으로 일어난 불이 이 일대 야산으로 바람을 타고 옮겨 붙어 검은 숯덩이로 변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불탄 나무 등걸 사이로 진달래와 노란제비꽃이 활짝 피었고 불탄 나무들을 제거한 야산에는 희망의 나무심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식물들의 생존경쟁은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먹이를 찾아 온 제법 큰 새들이 간간히 쉬어간다. 오래지않아 포유류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자연은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다독이며 희망의 입김을 불어 넣는다 오랜동안 시체처럼 서있던 검은 나무들은 빈자리를 만들며 하나 둘 흙으로 돌아간다
2000년 4월 온 나라가 총선의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 거대한 산불이 다시 발생했다. 고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고성 산불현장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이곳에 나비들이 날아들기 시작하고 미생물들과 미미한 곤충들이 가날픈 몸짓으로 숲을 가꾸고 있었다.
산불이 발생한 지 2년이 되었다. 국도변을 중심으로 보기 흉한 검은 숯덩이들은 대부분 베어져 트럭에 실려갔다. 인공 조림된 어린 나무들은 황량한 땅위에서 살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해가 바뀌어도 아직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곳이 있다. 당시 산불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검은 숯덩이 사이로 솟아오르는 생명의 몸짓. 그것은 인간의 실수로 무참하게 짓밟힌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였다. 주민들은 숲 만큼이나 새카맣게 타버린 가슴을 다독거리며 희망의 나무를 다시 심었다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넘는 1천만평의 국토가 소실되고 졸지에 모든 것이 재로 변했던 고성산불 현장에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탐스럽게 내린 눈은 불탄 나무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검은 산을 하얗게 감싸안지만 이내 앙상한 검은 줄기와 가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추위가 찾아오면서 식물들은 모든 지혜를 동원해 겨울을 나면서 이윽고 다가올 찬란한 봄의 향연을 준비하지만 고성산불 현장에는 인동하는 생명의 신비가 없다. 빛이 그려내는 그림자가 불에 탄 나무들의 유일한 몸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