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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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22:47

- 강원도 양양 미천골에서

그해 가을,
창밖에는 당단풍나무가 유난히 붉게 타올랐다.
어쩌자고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세상에,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단풍에
나는 그 가을 내내 화를 냈다.

 

어딜 둘러보아도 온통 화사한 단풍이다. 물소리는 쉼 없이 들려오고 울긋불긋한 나뭇잎들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휴대폰도 안 터지는 첩첩산중, 고개를 들면 곱게 물든 산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먼 산일수록 타오르는 단풍이 더욱 그윽해진다. 몇 해 동안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단풍의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보상이라도 받는 것일까. 나는 강원도의 숨겨놓은 오지에서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가을의 향연 앞에 서있다.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에 숨어있는 원시림, 미천골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요즈음, 도시의 거리에도 색색이 고운 단풍이 마음을 빼앗지만, 때 묻지 않은 자연에서 맞이하는 가을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근하고 수수한 아름다움이랄까. 굽이굽이 구룡령을 넘을 때 수줍은 듯 낯을 붉힌 산들이 줄지어 다가서는 모습이 그랬고, 미천골에 들어서자 웅장한 물소리와 함께 색색으로 물든 산등성이가 가득 펼쳐지는 모습 또한 그랬다.

숲은 그곳에 깃들은 천년 세월의 흔적도 품고 있다. 미천골 들머리에 자리 잡은 선림원지는  한때 승려가 천 명이 넘었다던 신라시대 사찰이었다. ‘미천(米川)’이라는 이름도 이곳에서 쌀 씻은 물이 십리나 흘렀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빈터에 남아있는 주춧돌에 앉아 있으려니 삼층석탑 너머로 높은 산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빈 절터가 주는 황량함보다는 편안함과 아늑함이 먼저 느껴진다. 수천 년의 세월을 변함없이 산은 이곳에 깃드는 모두를 품어주는 모양이다.  

계곡을 따라 길은 계속 이어진다. 발아래에는 아직 덜 마른 낙엽들이 스러지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따라가는 내내 물소리가 쫒아온다. 타는 듯 붉은 단풍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잠시 앉았다. 유난히 큰 물소리가 들려온다. 뒤돌아보니 바위 사이로 흐르는 폭포 물줄기에 계곡을 흘러가던 울긋불긋 나뭇잎들이 맴을 돈다. 벤치에 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언젠가 단풍을 보면 차오르던 슬픔이 물 위의 나뭇잎처럼 둥실 떠오른다.

그 때에도 먼 산이 울긋불긋했다. 큰아이가 지원하던 특목고에 원서를 접수하러 가고, 또 시험을 보러 가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을 오가면서도 창밖을 온통 물들이는 가을 풍경일랑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마음껏 기뻐하고 마음껏 누리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뭔가 착오가 있을 거야’ 하며 맥없이 바라본 창밖에는 당단풍나무가 유난히 붉게 타올랐다. 어쩌자고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세상에,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단풍에 나는 그 가을 내내 화를 냈다.

이제 큰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다. 밝은 모습으로 학교생활을 즐기며 학창시절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흐뭇하다. 지금은 오히려 일반고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도 내 마음에는 앙금이 남아있다. 그 당시 아이에게는 위로를 해주고 격려를 해주었지만,  아이를 ‘oo 과학고’에 보낸 엄마로 나는 얼마나 주위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던가, 그래서 그 가을 내내 얼마나 힘들었던가. 이제야 고백하건데 그런 엄마의 모습이 아이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고 짐이 되었으리라.

불바라기 약수로 이어지는 흙길로 접어들면서 숲은 더욱 그윽해진다. 웅대한 원시림과 깊은 계곡이 압도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화사하고 친근한 느낌이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다람쥐 발자국 소리마저 생생할 정도로 고요한 숲길을 걷는 내내 눈앞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미천골의 단풍은 여느 단풍 명소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노란색과 주황색이 주를 이루면서 전나무의 푸른색이 보태져 숲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저마다 자기만의 빛깔로 온 산을 환하게 물들이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돋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어우러지는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한없이 평화로워진다. 경쟁에서 이기고 싶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들, 어떻게든 자식이라도 그렇게 키우고 싶은 욕심들이 이 순간만큼은 부질없게만 느껴진다. 산 아래 세상에서도 이 마음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내려가야 할 시간인데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자꾸 발길을 내딛는다. 그렇게 나는 작은 점이 되어 자연이 그려놓은 거대한 가을 풍경화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글. 최경애(수필가)  사진. 김선규(생명다큐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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