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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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구름 위로 우뚝 선 저 산처럼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8. 22:50

- 한라산 윗새오름에서

구름 바다 위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드러난다.
온 세상이 구름과 안개에 잠겨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 광경이
내게는 신의 계시나 불변의 진리처럼 다가왔다.

 

안개가 자욱하다. 차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을 달린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또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채 꿈속을 헤매는 느낌이다. 그 언젠가 끝없는 안개 속을 홀로 걸어가는 꿈을 꾸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뿐, 나는 안개의 바다에 휩싸인 고독한 섬이었다. 그 섬에는 내 목소리만이 외로운 독백이 되어 울려 퍼졌었다. 이른 아침,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그렇게 나는 안개 속을 헤매었다.

하늘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공항 대합실에 비행기 결항을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지고 창밖에는 뿌연 안개가 바깥 풍경을 온통 점령하고 있다. 어렴풋이 보이는 비행기며 버스들도 굳게 침묵한 채 미동이 없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늘아래 끝도 없이 펼쳐지는 구름 바다 위로 우뚝 솟은 검푸른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한라산이다. 좁은 기내에서 창밖으로 내려다 본 한라산의 첫 인상에 벌써부터 가슴이 울컥했다.

 

그동안 수차례 제주에 왔건만 한라산에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이가 어려서, 날씨가 좋지 않아서, 일정이 촉박해서 등등의 이유로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한라산은 그나마 구름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한라산에 오르기로 맘을 먹었다. 정상까지 가지는 못하지만 비교적 산행거리가 짧으면서도 한라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영실코스를 택했다.

이튿날 아침, 멀리 자태를 드러낸 한라산을 보자 마음이 설레였다. 잔뜩 찌푸렸던 전날과는 달리 하늘은 유난히 맑고 바람은 한없이 포근하다. 등반은 영실휴게소에서 시작했다. 수직으로 갈라진 수많은 기암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웅장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백장군이라고도 불리는 영실기암이다. 흙을 퍼 날라 한라산을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이 오백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들을 위해 죽을 쑤다가 펄펄 끓는 죽 솥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맛있게 죽을 먹었던 아들들이 한없이 슬퍼하며 울다가 바위가 되어 제주를 지키는 오백장군이 되었다는 것이다. 곤궁한 시절에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을 제살과 피로 키운 어머니가 어디 한둘이랴. 마음이 아릿해진다.

능선을 오르다 자꾸 뒤를 바라본다. 바람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지막한 나무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오름들과 마을들, 그 너머로 몰려다니는 구름들……, 그런 풍경에는 제주의 숨결이 짙게 스며있다. 길을 갈수록 하얗게 쌓인 눈 사이로 더욱 푸릇한 제주조릿대와 키 작은 구상나무숲이 동화 속 마법의 화원 같은 느낌이다. 이윽고 도무지 산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너른 평지가 나온다. 선작지왓이다. 평원 사이로 우뚝 백록담을 담은 한라산 정상의 모습이 보인다.

드넓은 평원과 독특한 식물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은하수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높다는 한라산에서 신선이 흰 사슴과 노닐었다는 백록담 정상을 바라보며 걷는 길 내내 신들의 세상을 엿보는 기분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았던, 구름 위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바로 이곳이리라. 온 세상이 구름과 안개에 잠겨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 광경이 내게는 왜 이렇게 신의 계시나 불변의 진리처럼 느껴지던지.

살다보면 짙은 구름이 끼고 안개가 자욱한 날들이 있다. 때로는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뿌연 안개 속을 헤매며 ‘어디로 가야하나, 무엇을 해야 할까’ 방황을 한다. 너무나 잘 아는 길도 안개 속에서는 의심과 두려움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엄습하는 안개 속에 휩싸여서 밝은 대낮에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흔들리고, 불신하는 내 마음이 자꾸 안개를 만들어내기 때문은 아닐까.

윗새오름에서 내려다보이는 크고 작은 오름들과 마을들 그리고 바다가 구름에 잠겨 있다. 안개 속을 헤매며 아등바등 살던 세상이건만 높은 곳에서 보는 아스라한 풍광이 아름답기조차 하다. 돌이켜보면 올 한해도 정신없이 안개를 헤치며 달려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회한보다 감사의 마음이 먼저 인다.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살다보면 안개 자욱한 날들도 있으리라. 그럴 때면 구름 뚫고 솟아있던 저 산을 기억하리라. 앞이 보이지 않는 구름과 안개 속에서도 대지에 든든히 뿌리박고 변함없이 서있는 저 한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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