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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꽃보다 가족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10. 16:39

- 경남 산청군 대포마을에서

“찰칵”
온 가족이 카메라를 보며 모처럼 웃는 순간,
마당에 핀 꽃보다 지리산의 신록보다
이 순간 가족의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밥상에서 만난 지리산의 봄

지리산의 봄은 더디게 찾아옵니다. 마을을 굽어보는 산등성이들은 이제야 봄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오래된 고목에도 갓난아기 같은 새싹들이 돋아납니다. 잦은 비와 뒤늦은 추위 끝에 느닷없이 다가왔던 도시의 봄과는 달리 천천히 음미하듯 이곳의 봄은 느리기만 합니다. 마을의 어느 골목 끝에서 한 집을 만납니다. 뒤늦게 핀 동백꽃이 툭툭 떨어진 마당 한편에는 아이들 자전거와 울긋불긋한 장난감들이 널려있습니다. 정재진(73)씨 댁입니다.

“어여 오이소, 배고프지예..”
부엌에는 점심 준비가 한창입니다. 금방 뜯은 싱싱한 나물들을 삶고 데치고 볶고 지지는 이 냄새야말로 진정한 봄향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새 산에 가면 온통 반찬잉기라, 있는 나물해서 밥 먹게 점심 먹지 말고 오이소, 마..”
아는 사람의 소개로 4대가 모여 사는 정재진씨 댁을 방문하려고 연락을 드릴 때였습니다. 흔쾌히 승낙을 하시던 김옥희(65) 아주머니는 집에 와서 점심을 먹으라고 신신당부까지 하시더군요. 그렇게 염치불구하고 조무임(94)할머니와 아들 정재진씨 부부와 함께 밥상에 앉았습니다.

금방 밥상이 차려집니다. 현미찹쌀로 갓 지은 밥, 들깨 미역국, 참나물 무침, 머위쌈, 야채전……. 밥상 가득 봄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아침에 산에서 뜯은 참나물 무침은 강하면서도 신선한 향이 일품입니다. 머위 잎에 쌈장을 넣고 밥을 싸서 먹으면 진하고 쌉쌀한 특유의 맛이 입맛을 당깁니다. 나무에서 갓 딴 표고버섯과 참나물, 부추, 감자가 들어간 야채전은 각각의 독특한 맛과 향이 또 얼마나 절묘하게 어우러지던지요. 쌉싸래하고 향긋하면서도 순한 지리산의 맛을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요. 지리산의 봄은 그렇게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배가 부르도록 들어왔습니다.

 

#4대가 모여 사는 가족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저씨는 새끼를 찾으러 마을로 내려 온 집채만 한 반달곰을 잡았던 옛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한 동네에 살다가 열여덟에 시집 온 아주머니는 ‘시아버님이 마흔다섯 군데 혼사자리를 보고나서 마지막으로 점찍은 며느릿감‘이었다고 합니다. 지리산에서 나고 자란 이들 부부가 부모님을 모시고 2남3녀를 키우며 함께 한 세월이 반백년이 되어갑니다. 지금은 장수마을로 유명한 대포마을에서도 가장 건강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둘째 아들과 함께 4대가 모여 살고 있습니다.

갑자기 온 마을이 들썩거립니다.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승합차에서 내립니다. 물소리와 함께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흘러옵니다. “우리 둘째 아들은 애들이 세 개야...” 반갑게 아이들을 맞이하시는 아주머니가 “애들 세 개”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첫째 한결이, 1학년 둘째 소명이, 그리고 유치원생인 막내딸 수빈이가 뛰어다니는 집은 순식간에 활기가 넘칩니다. 증조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아이들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십니다. 그 연세에 돋보기 없이 글을 읽으시고 청력도 좋은 조무임 할머니의 건강 비결은 바로 아이들인 것 같습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둘째 아들 내외까지 한자리에 모여 4대가 가족사진을 찍느라 마당은 다시 분주해집니다. 의젓한 첫째 한결이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눈을 감고, 개구쟁이 둘째는 메롱을 하며 까불거리고, 귀염둥이 막내딸은 제 엄마에게 매달려 수줍게 카메라를 바라봅니다. 온 가족이 카메라를 보며 모처럼 웃는 순간, “찰칵”. 마당에 핀 꽃보다 지리산의 신록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바로 이 순간 가족의 모습이 아닐까요. 인자한 증조할머니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할아버지는 든든한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주십니다. 재롱둥이들의 웃음이 집안에 끊이지 않고,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빠와 엄마는 아이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려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식구들을 모두 돌보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지리산을 닮은 어머니의 품
이번에는 온 가족이 밥상에 모였습니다. 배고파하는 아이들을 위해 빈대떡을 부치고 곶감과 사과를 내오느라 아주머니와 며느리가 부엌을 들락거립니다. 시끌벅적한 밥상에 무수한 젓가락이 오가고 빈대떡과 과일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춥니다. 조잘거리는 아이들과 함께 밥상머리에는 다시 이야기꽃이 피어납니다. 둘째 아들네 집은 소를 키우는 축사 옆에 있습니다. 맞벌이를 하는 며느리 대신 세 아이들을 돌보는 건 언제나 아주머니 몫입니다. 내일은 소풍가는 소명이를 위해 도시락을 세 개 준비해야합니다. 아이들 할머니가 반대표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기 때문에 선생님 도시락도 챙겨야 하니까요.

이제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아주머니가 바빠지십니다. 갈 때 주려고 많이 뜯었다며 지리산 머위와 참나물을 한 아름 안겨주시고, 뒷마당에 놓여있는 커다란 항아리에서 직접 담근 감식초를 큰 생수병에 담아 주십니다. 현미밥을 잘 먹는다며 현미 찹쌀에, 집에 가서 아이들 부쳐주라고 빈대떡 반죽도 싸주시면서 연방 뭐 더 줄 것 없나 두리번거립니다. 생수회사에 다니는 둘째 아들은 어느새 생수병 묶음을 차에 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다 퍼주시면 집에 뭐 남아요?” 하며 사양을 해도 자꾸 퍼줘야 또 생긴다며 아주머니는 활짝 웃습니다.

50여 년 동안 시어머니 모시면서 바쁜 며느리 대신 손자들까지 챙기느라 일이 많으실 텐데도, 아이들 학교일도 도맡아 하시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도 늘 팔을 걷어 부치시는 아주머니, 더구나 가족들뿐 아니라 남에게까지 끝없이 베푸시는 아주머니의 품은 얼마나 크고 넓은 것일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사람 사는 냄새가 꽃보다도 향기롭고, 서로 정을 주고받는 마음이 봄 햇살보다도 따스한 것을……. 봄이 더디 오는 지리산의 작은 마을에서 마음은 더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지리산의 봄을 나누다
늦은 밤, 빈 집에 불을 켭니다. 고등학생 두 아이들은 아직 안들어오고 막내는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갔습니다. 식구가 많은 편인데도 집이 텅 비기 일쑤이고, 온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일이 힘들어진 지도 오래입니다.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도 한참을 별러야 하지요. 성공과 성취를 위해 과도하게 경쟁으로 내몰리는 세상에서 가족은 점점 흩어지고 파편화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공부 때문에 앞으로만 달려가면서 우리는 정말 소중한 것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화사한 신록이 온 천지를 물들이는 도시의 봄날, 왜 그리 마음은 춥고 쓸쓸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진정한 봄은 가족과 따뜻한 정을 나누고 이웃과 마음을 나눌 때 비로소 찾아온다는 것을요.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늦게 집에 돌아오는 아이들에게 빈대떡을 먹이며 지리산의 봄을 전해주었습니다. 참나물과 머위를 큰 냄비 가득 데쳐서 무치고 야채전을 만들어 이웃들과 나누었습니다. 평소에 맛이 없을까봐 주저하던 마음도, 번거롭고 귀찮던 마음도 모두 날려 보냈습니다. 지리산의 봄을 나누는 일이니까요. 한 줄기 봄바람은 내 마음에도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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