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17/07 (95)
빛으로 그린 세상
초롱초롱한 두 눈이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얼굴과 몸짓이 닮은 아빠와 아들이다. 잠시 뒤 귀에 익숙한 “땡”하는 전자레인지 벨소리가 정막을 깨트림과 동시에 두 사람은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자, 먹자”라며 같은 동작으로 신나게 합창을 한다. 요즘 인기 있는 개그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뚱보 아빠와 아들이 먹을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웃음이 빵 터진다. 다른 것은 몰라도 두 사람은 적어도 먹을 것에 대해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한 마디로 소통이 되고 있다. 내겐 아들이 셋 있다. 큰 아이는 대학교 2학년. 가끔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해야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바쁘다. 아빠와 함께 산책도 하고 놀이도 하던 막내아들도 봄날 지나가듯 훌쩍 커버려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다. 질풍..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혔다. 밤새 내린 눈이 모든 걸 뒤 덮었다. 베란다로 내다 본 세상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경계로 하늘색과 하얀색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니 잠시동안 입시로 바쁘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해 지는 듯 했고, 한동안 책상에만 놓여있던 카메라를 꺼내들고 아빠를 깨웠다. 아빠와 함께 하는 올해 마지막 사진 산책을 나섰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이른 아침 산책길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고, 내가 내 딛는 한발, 한발이 연신 발자국을 만들어 냈다.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혀 있었다. 늘상 보던 눈, 늘상 보던 광경들이였지만, 이렇게 일찍 나와서 밤새 내린 눈이 모든 것을 덮은 광경을 본 것은 처음이였고, 신비로웠다. 그리고 그 신비한 모습들을 사진으로 더 ..
-하늘은 넓었다. 드디어 수시 합격자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가슴조리며 컴퓨터를 켰지만 선뜻 열어볼 수 가 없었다. 잠시 후 병원에서 공익근무를 하는 형에게서 문자가 왔다. “ ㅠㅠ”. 형도 기대가 되었는지, 먼저 결과를 확인하고 내게 통보를 해주었다. 믿기지 않아서 나는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교무실로 찾아갔다. 선생님들은 모두 모여서 나에게 웃으시며 “더 좋은데 가야지~” 라고 달래주셨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았지만 기대가 컸기에 그에 따른 실망도 컸다. 납득할 수 없는, 외면해버리고 싶은 현실이 나를 괴롭혔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엄마에게 전화를 해 엄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침 하늘에서 비가 주륵주륵 내렸다. 나는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자전거를 ..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어김없이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애타게 엄마를 찾는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에 내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장정 4명이나 있는 우리 집에 왠 아기 울음소리? 혹시 늦둥이? 애석하게도 계속 들려온 우는 소리는 다름 아닌 길냥이들이 밖에서 내는 소리였다. 길냥이는 길거리의 ‘길’과 고양이의 애칭인 ‘냥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하지만 그 귀여운 억양과는 반대로, ‘길냥이’는 아주 가슴 아픈 뜻이 있는 단어이다. 집에서 길러지다가 이사, 정리 등의 이유로 밖에 버려진 고양이들을 길냥이라고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모든 동물을 ‘he’나 ‘she’가 아닌 ‘it’으로 표현을 한다. 이는 물건을 지칭하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기르던 고양이를 불쌍한 길냥..
시험을 망쳤다. 내가 자신 있어 하던 사회 과목이었지만, 답은 신기하게 내가 찍은 선택지만 빗겨 나갔다. 평소에도 시험을 망친 적은 꽤 있었지만, 그때는 친구들과 웃어 넘기고 금새 극복하던 나였지만, 유달리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자신 있었던 사회 과목을 망치니 몹시 속상했다. 학교에서 채점을 하면서 시험지를 찢어버렸다. 아직 남은 시험을 위해 도서관을 가자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무작정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얼마 전 열심히 공들여 제출한 환경 독후감 결과 발표가 남아 있어서, 꿀꿀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내심 기대하며 나는 컴퓨터를 켰다. 수상자 명단을 찾아보고 다시 찾아봐도 내 이름 석자는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았다. 이 또한 역시 평소 같았으면 “에잉, 다음에 도전하지 뭐” 라며 쿨하게 ..
준우야 시험 공부하느라 무척 바쁘지. 그 바쁜 와중에도 아빠와 하는 사진산책이 너에게 활력을 주는 것 같아 무척 기쁘단다. 물론 준우와 함께하는 사진산책이 아빠의 삶속에도 쉼표를 주고 있단다. 아빠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느꼈겠지만 사진과 산책은 참으로 많이 닮은 것 같아. 산책에서 즐거움과 사진의 즐거움이 같은 점이 많거든 너에게 사진을 가르켜 주면서 아빠의 첫째 원칙은 ‘사진찍기는 즐거운 놀이’라는 것이지. 준우가 어렸을 때 아빠 카메라를 가지고 아빠 흉내를 내며 놀 때의 그 즐거운 마음을 잃지 않게. 아빠가 처음 사진을 배울 때에는 너무 교과서적으로 원칙을 쫒다 보니 정작 사진이 주는 즐거움과 재미를 잃어버린 곤 했지. 노출, 조리개, 셔터스피드, 피사계심도등등 이런 복잡한 사진촬영 형식들은 다 내려..
나는 산책을 하면서 멋있는 나무가 보이거나, 예쁜 꽃들, 간혹 처음 보는 것들과 조우하면 습관적으로 셔터를 눌러 사진으로 간직하고, 그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데에 그쳤다. 이번 산책에도 어김없이 반사적으로 셔터로 손가락을 옮길 뿐, 내가 무엇을 찍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아했다. 나는 그저 아빠가 찍었던 정말 예쁜 꽃들과 멋진 자연의 풍경을 아빠 못지 않게 찍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그저 ‘웅장한 나무’, ‘예쁜 꽃’을 찍는 행위를 반복한 다는 것을 눈치를 채셨는지, 아빠가 갑자기 꽃과 나무들을 손가락으로 가르키시며 그들의 이름을 물어보셨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것이 없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름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
금요일 저녁, 내일이면 주말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신나서인지, 흥분해서 축구를 하다가 바지가 터졌다. 교복 바지 엉덩이 부분이 크게 열렸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신나게 축구를 했다. 땀에 흠뻑 젖었는데, 이상하게 아랫도리가 시원해서 나중에 알아차렸지만 이미 많은 친구들이 그 모습을 봤을 생각을 하니 너무 민망했다. 후드를 벗어서 허리에 감싸고 바지의 터진 부분을 가려서 위기는 모면했지만, 민망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토요일에 책을 읽는데도 계속 그 전날의 일이 생각나서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서, 나는 모처럼 카메라를 집어 들고 밤에 사진 산책을 나갔다. 산책은 밤에도 많이 나가보았지만, 카메라를 들고 나간 적은 처음이었다. 인공 조명이 호수공원을 환히 비추고 있었고, 많은 사..
언젠가 잡지에서 서울 한복판에 자동차들이 지나가면서 그 불빛들이 남긴 궤적이 만들어낸 멋진 사진을 본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나도 그런 멋진 ‘궤적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서 밤에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캄캄한 밤인데도 라이트를 켜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쌩쌩 지나가는 자전거 불빛이 남기고 가는 그 궤적들을 사진으로 담아 내면 정말 멋진 사진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사진을 찍기 위해서 ‘조리개를 열어 놓는다’ 까지 밖에 몰랐던 나는 내가 원하던 캄캄한 호수공원의 야경 안에 빛의 궤적들이 그린 멋진 그림을 얻지는 못했다. 자전거가 너무 빨리 지나간 탓인가? 아니면 불빛이 너무 약해서 그런가? 다양한 의문점이 들었고 혼자서 해결해 보려고 이리저리 다른 시도를 해봤..
준우야 아빠가 지난봄에 선물한 카메라(니콘 D3100) 맘에 드니? 비싼 카메라는 아니지만 사진을 시작하는 너에게 좋은 동반자가 될 거야. 아빠가 사진을 처음 접한 이후 직업으로 20여년을 지내는 동안 많은 카메라를 사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카메라는 정을 가장 많이 나눈 카메라(니콘 FM2)였던 것 같아.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최첨단 디지털 카메라에는 성능과 편리함에서 비교할 수 가 없지만 오랜 세월 함께 하면서 손때가 묻은 당시의 필름카메라가 아직도 제일 좋은 카메라로 기억돼. 물론 그 카메라와 함께 ‘가평상공의 UFO출현’ ‘목숨 건 도강’등 전국을 들썩일 정도의 특종도 많이 했지. ^ ^ 아빠가 처음 사진기를 접한 건 아빠의 아버지 카메라였어. 교사이셨던 할아버지는 성격이 꼼꼼한 분이시라 카메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