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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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아빠와 아들의 사진산책

3-1(“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3. 15:21

<준우>

나는 산책을 하면서 멋있는 나무가 보이거나, 예쁜 꽃들, 간혹 처음 보는 것들과 조우하면 습관적으로 셔터를 눌러 사진으로 간직하고, 그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데에 그쳤다. 이번 산책에도 어김없이 반사적으로 셔터로 손가락을 옮길 뿐, 내가 무엇을 찍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아했다. 나는 그저 아빠가 찍었던 정말 예쁜 꽃들과 멋진 자연의 풍경을 아빠 못지 않게 찍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그저 ‘웅장한 나무’, ‘예쁜 꽃’을 찍는 행위를 반복한 다는 것을 눈치를 채셨는지, 아빠가 갑자기 꽃과 나무들을 손가락으로 가르키시며 그들의 이름을 물어보셨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것이 없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름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분명 각자의 이름이 있을 텐데, 그 들의 이름조차 알지도 못하고 겉모습의 아름다움만 취하려 했던 나는 어쩌면 자연을 찍을 자격이 없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답하지 못한 것이 무안해서 그저 앞만 보고 걷고 있는데, 아빠가 갑자기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이게 된다”는 말을 하셨다. 솔직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나는 분명히 자연만이 줄 수 있는 형용할 수 없는 신선함과 상쾌함을 정말 좋아하고, 그래서 자연을 정말 사랑하는데, 정작 이렇게 알지 못하는 것은 그저 그들의 겉모습만 사랑했던 것일까?  매혹적인 핑크색 꽃을 지니고, 지나가는 행인을 단숨에 사로잡는 진한 향기를 지닌 라일락 꽃, 수 천년, 수만 년을 살아온 기세 등등한 메타세콰이어 등등.. 아빠는 그 아리송한 말을 하신 후에 이번 산책길에서 마주하는 것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알려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히 호수공원으로 갈 때 지나친 똑 같은 길에 있는 나무와 꽃들이었지만, 전에는 그저 ‘멋진 나무’와 ‘예쁜 꽃’ 이었는데, 그들의 이름과 특징을 배운 후에는 ‘메타세콰이어’, ‘라일락’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마치 많은 대중 속에서 내 친구의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듯이, 신기하게도 정말 ‘내가 아는 만큼 보이게’ 됬다.

문득 이런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별 볼일 없고 사고만 치는 나를 담임선생님께서는 항상 “야!” 라고 만 부르신 적이 있었다. 그러다 1학기가 지나고 내가 특목고를 진학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수업도 열심히 듣고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자 담임선생님께서는 사소한 것에도 내 이름 석자를 또박 또박 불러주시며 나를 칭찬해주셨는데, 그런 소소한 것이 준 감동의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정신을 차린 후 선생님께서 비로소 나를 사랑해주시고, 그래서 더욱 나를 알게 되시고, 그 만큼 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선생님 눈에 더욱 띄어서 가능했던 것일까?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이게 된다’라는 말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평범한 ‘나무’와 ‘꽃’에 지나지 않던 것이 새롭게, 눈에 띄게 다가오고,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 선사해 주신 감동, 그리고 앞으로는 내가 그 감동을 남들에게 선사해 줄 수 있기 까지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이게 된다’라는 말은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아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중략

준우가 오랜만에 김춘수 시인의 <꽃>을 떠올리게 했네. 참 좋은 시지. 아빠도 이 시를 통해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단다. 우리가 글자를 모르면 ‘문맹’이라고 하고 컴퓨터를 모르면 ‘컴맹’이라고 하지. 그러면 우리 주변에 있는 꽃과 나무의 이름을 모르면 무어라고 부르는 지 아니? ㅎㅎ
바로 ‘생태맹’이라 하지.

사실 아빠도 오래 전부터 숲 관련 NGO활동을 하면서도 몇 년 전까지 우리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나무와 풀 이름을 제대로 몰랐단다, 어느 여름날 숲 캠프에서 아빠가 대타로 조장을 맡았는데 캠프에 참여한 꼬마들이 아빠에게 풀과 나무의 이름을 물어 보는데 아빠가 아는 것이 거의 없었어. 얼마나 부끄럽던지. 새삼 얼마나 무심하게 살아왔나 후회하게 되었지.

그 후 집에 돌아와 식물도감을 찾아가며 아파트 주변의 꽃과 나무들을 찾아 나섰지.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 마자 제일 먼저 큰 나무가 눈에 들어왔지. 회화나무였어. 수 년 동안 아파트 현관 앞을 지키고 서 있었는데도 그 나무가 무슨 나문지 이름도 모르고 지나쳤던 거야. 그 나무가 아빠를 얼마나 원망했겠니. 회화나무를 어루만지며 나무에게 사과했지. 그 후로 아빠의 닉네임을 ‘회화나무’로 정해 아직도 아빠의 닉네임을 회화나무로 쓰고 있단다. 회화나무를 알고 나니 우리 동네 곳곳에 있는 회화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야. 일산 마두역 이면 도로의 가로수가 회화나무라는 것도 알았고 올림픽 대로변 많은 가로수가 회화나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또한 아빠 회사 옆 농협중앙회 정원에 700여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킨 나무가 회화나무 라는 사실도 알게됐지.

준우야 참 신기한 일이지 그 동안 무심코 지나쳐 왔던 것들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주니 그들도 내게로 다가와 꽃이 되고 나무가 되었고 서로의 감정이 통하는 것처럼 교감을 가질 수 있었던 거야. 

준우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고 했지. 그리고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았던 것과 다르게 보이는 법.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들에 관심을 가져주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니 세상이 달라 보였어. 집밖을 나서면 아파트 화단에 꽃들이 인사를 하고 발 밑에 있던 작은 생명들이 말을 건네 왔지. 우리 아파트 단지에 그렇게 많은 꽃과 나무들이 있었는지 예전에 미처 몰랐지. 노란 민들레를 시작으로 꽃다지, 목련, 벚꽃, 라일락, 찔레꽃이 이어 달리기 하듯 피어나고 계수나무, 모감주나무, 자귀나무가 자태를 뽑내고 있지. 남들이 봄이 짧다고 하지만 긴 겨울을 이기고 새로 얼굴을 내민 작은 꽃들과 새싹을 바라보는 재미에 아빠의 봄은 그 어느 계절보다 길고 설레임으로 가득하단다.


봄까치꽃(큰 개불알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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