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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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아빠와 아들의 사진산책

3-5(하늘은 넓었다)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3. 15:32

<준우>-하늘은 넓었다.

 드디어 수시 합격자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가슴조리며 컴퓨터를 켰지만 선뜻 열어볼 수 가 없었다. 잠시 후 병원에서 공익근무를 하는 형에게서 문자가 왔다.
“ ㅠㅠ”.
형도 기대가 되었는지, 먼저 결과를 확인하고 내게 통보를 해주었다. 믿기지 않아서 나는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교무실로 찾아갔다. 선생님들은 모두 모여서 나에게 웃으시며 “더 좋은데 가야지~” 라고 달래주셨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았지만 기대가 컸기에 그에 따른 실망도 컸다. 납득할 수 없는, 외면해버리고 싶은 현실이 나를 괴롭혔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엄마에게 전화를 해 엄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침 하늘에서 비가 주륵주륵 내렸다.

나는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자전거를 타고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얼굴에 비 섞인 바람이 휘몰아치고 눈앞은 점점 뿌옇지만 그 동안 고생한 기억들과 아낌없이 도와주시던 주변 분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 되어 버렸다는 허탈감에 나는 무작정 달리고 달렸다. 다리에 힘이 거의 빠질 정도로 한참을 달리다 호수 앞에 멈췄다. 아빠와 함께 사진을 찍던 곳이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참 넓었다.

 

커다랗게 뜬 달과 큼지막한 구름들이 다 덮을 수 없을 정도로 하늘은 정말 넓었다. 그리고 그 넓은 하늘 아래에 서 있는 나는 정말 작았다. 원하는 대학에 선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세상을 잃은 것 마냥 좌절했지만, 이런 사실이 넓디 넓은 저 하늘에 비해서는 정말 작고 사소한 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 졌다. 엄마, 아빠의 격려와 친구들의 위로 문자에도 마냥 좌절에 빠져있었는데 하늘 한번 바라봤다고 마음이 편안해 지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리고 그 날은 이상하리만큼 하늘이 넓게 보였다.

그때 이후로 나는 몇번의 고배를 더 마셨다. 너무나도 쓰디썼지만 그때마다 바라보던 하늘은 여전히 넓었고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의욕과 용기가 생기곤 했다. 대학에 가는 것은 내 인생의 목표가 아닌 과정일 뿐이고, 내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내 노력을 알아주는 대학이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운동을 하러 나갈때도, 친구들과 만나서 놀 때도,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던 와중에도 나는 몇 번씩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언제나 넓었다. 다만 내 욕심과 기대 때문에 당장의 것만 바라보며 실망을 하고 바꿀 수 없는 현실 탓만 하던 것이 아니였을까. 난생 처음으로 받은 최고의 상심을 가슴에 안은 채 뿌리는 비를 온 얼굴로 맞으며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던 그 때, 나는 아마도 최고의 항우울제를 얻은 것 같다.

 

 

 

<아빠>-사진 두장


오늘 준우 글을 읽으며 아빠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구나. 너의 글을 읽는 동안 개구쟁이 시절 너의 모습도 떠오르고 아빠와 여행 다니며 겪었던 옛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가는 구나. 유난히 코를 많이 흘려 한때 코찔찌리 라고 불렀는데 그런 너가 몸과 마음이 다 큰 어른이 되었구나.

아마 준우가 5살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빠와 둘이 강원도 깊은 산골에 단 둘이 갔던 일 생각나니. 아빠는 표지사진을 만들기 위해 모델이 필요해 어릴 적부터 포토제닉한 준우를 설득해 데리고 갔었지. 그날 밤 산등성이에서 너를 배위에 올려놓고 바라본 수많은 별들의 군무를 아직 잊을 수 없구나. 아마 그날 밤 넓은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준우 머릿속에 들어와 아직도 반짝이는 등대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 준우야 하늘 참 넓지. 아빠는 지난 1995년 가평에서 세계적인 특종으로 기록된 UFO를 찍고 나서는 틈만 나면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지. 언제 바라보아도 하늘은 참 넓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적이 없는 것 같아. 아빠가 좋아하는 일본의 한 사진작가는 자기 집에서 바라본 하늘을 기록하며 매일 그날의 사진일기를 쓰고 있단다.

준우가 경험한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게 되지. 아마 준우에게 닦친 일들은 시작에 불과할 거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시련과 고난이라는 바람이 찾아와서 우리 삶의 잔가지들을 쉴새없이 흔들게 될 거야.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날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그 결정에 일희일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 때 조금만 눈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늘 준우처럼 그 괴롭고 힘든 마음들이 한줌의 구름이 되어 두둥실 흘러갈텐데...그래서 오늘 아빠가 준우에게 두가지 사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구나.

준우야 아빠가 백두산에서 찍은 은하수 사진 봤니?  2006년 초가을, 아빠는 백두산 정상에서 홀로 밤하늘의 별을 담고 있었지. 고요한 천지, 그 위로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온세상의 별이란 별은 모두 이곳에 모인 듯 황홀하고 엄숙한 광경에 한동안 넋을 잃었단다. 매서운 바람과 추위도 아빠의 황홀경을 깨지 못했지. 그때 아빠는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넓은 하늘을 본 것 같아. 사실 그 당시 아빠도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로 많은 시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거든. 그리고 그날 밤, 천지의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준우가 오늘 호수공원의 밤하늘을 보고 느꼈듯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상의 고민들과 어려움들이 저 광활한 우주를 보면서 얼마나 미미하고 하찮은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모처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밝고 힘찬 에너지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그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살을 에는 추위에 손발이 저려오고 바람이 더욱 거세져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졌어. 그리고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지. 서둘러 카메라 장비를 꾸리다 이곳을 떠나기 앞서 소원을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소원을 말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 같았거든. 하지만 무념무상의 경기가 깊었던지 딱히 소원이 떠오르지 않았어. 다만 백두산에서 시작된 단풍을 따라 한라산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지.
“백두산 천지신이시여, 여기서 시작된 단풍을 따라 한라산까지 내려가 보고 싶습니다.” 얼떨결에 소원을 말해버렸어.

 


준우야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백두산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 돼 방송국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어. 백두대간을 따라 단풍기행 프로를 제작하는데 리포터를 맡아 달라는 전화였어. 마치 예정되었던 것처럼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인 것 같았어. 백두산 기도발이 그렇게 강할 줄 몰랐지. ㅎㅎ

방송은 설악산을 출발해 매주말 백두대간 단풍을 따라 한라산까지 가는 두 달간의 여정이었어. 백두산 천지에서 빌던 소원이 현실화 된 것이지. 어렵게 회사의 허락을 받아 매주말 백두대간 단풍기행이 시작된거야. 설악산을 출발해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을 돌아 단풍의 절정 내장산을 돌아본 후 마침내 지리산 종주를 나서게 되었어.

처음 해본 지리산 종주는 아빠의 인생에 많은 의미를 던진 뜻깊은 산행이었어. 수 차레 지리산에 올랐어도 난생 처음해 보는 종주는 설렘과 긴장의 연속이었지. 걷다가 쉬고 또 걷다가 먹고 자고...2박3일간의 종주를 위해서는 그저 걷는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서서히 아빠가 변하기 시작했어. 단지 걷고 또 걸었을 뿐인데...

분명히 출발은 온전한 나로 시작되었지. 하지만 한발두발 내 딛기를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하면서 내 자신이 조금씩 없어지는 느낌을 받았어. 발 앞에 놓인 흙과 돌, 나무와 바람이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자연의 일부분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천왕봉이 가까워 오면서 돌과 바람과 나무가 나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어. 아빠도 지리산의 흙과 돌과 바람이 되가는 느낌이었지.

꼬박 2박3일을 걸어 마침내 천왕봉에 정상에 섰을 때는 아빠 몸도 한줌의 바람처럼 가볍게 느껴졌어. 고맙고 감격스런 마음이 깊은 곳에서 올라왔지. 아마 그런 느낌은 지리산 종주를 하지 않았다면 평생 느낄 수 없었을 거야. 그리고 저 멀리 발아래 펼쳐진 살아온 세상에 두고 온 것들이 그립고 미안하고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했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지난 사흘간 지나쳐온 수많은 능선을 바라보며 큰 절을 올렸지. 그 순간 아빠가 할 수 있는 지리산에 대한 최대의 예의표시였어.

 

준우는 아빠가 찍은 ‘천지 은하수’와 ‘지리산 여명’중 어떤 사진이 맘에 드니? 아빠는 두 사진을 볼때마다 그 당시의 감동과 환희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란다. 아마 앞으로도 위 사진들을 찍을 때의 감동은 아빠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된단다. 준우가 호수공원에 바라본 밤하늘과 아빠가 천지에서 바라본 하늘 그리고 지리산 종주에서 느꼈던 자연과 하나 되는 경험은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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