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17/07 (95)
빛으로 그린 세상
밤새 배가 아파서 설사를 하며 잠을 뒤척였다. 전날 밤에 먹은 치킨이 뱃속에서 부활해서 뛰어다니며 콕콕 찌르는 것 같이 아팠다. 새벽에 눈을 뜬 후 바람을 쐬러 베란다로 나갔다. 창밖을 바라보니 환상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뽀얀 안개가 바닥에 깔려서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멋진 풍경 사진들 중에서 안개가 껴있는 풍경은 훨씬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이 찬스다. 배가 아팠지만, 멋진 사진을 위해서 이정도 복통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당장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를 챙긴 후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깬 아빠와 호수공원에 도착하였다. 안개가 낀 모습이 적나라게 드러나는 아파트 위에서 바라보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지만, 안개 속에서 ..
평소 길을 걷다가 발목이 간질거려서 내려다 보면 조그마한 풀들과 꽃들이 그 범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겨우 내 발목까지 밖에 미치지 않는 풀들이나 꽃들을 별로 심중하게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라, 못 보던 풀이네”, “예쁜 꽃이네”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았었다. 가끔 귀엽거나, 사연이 있는 것 같은 꽃을 보면 사진으로 담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연신 고개를 떨구고, 허리를 굽혀도 사진은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에잉, 한낱 조그마한 꽃 따위. 원래 별로인데 사진으로 담으려 해도 오죽하겠어” 라며 포기를 해버렸다. 오늘도 산책을 하던 중 어김없이 귀여운 꽃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차피 사진으로 담아도 예쁘게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아빠가 갑자기 “그..
“무조건 다 나오게, 무조건 넓게…” 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할 때부터 무조건 넓게 보고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었다. 욕심을 부리면서 더 많은 것을 한가지 사진에다가 담으려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무조건 다양한 색이 나오고, 많은 사물들이 나와야 예쁜 사진이다’라는 생각이 머리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원래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는 성격 탓일까? 항상 시험공부 할 때도 보면 나는 큰 그림을 보고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공부를 하곤 했다. 책을 펼치고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쭈우욱 훑고 큰 틀을 이해한 후 “공부 다했다!”고 외친 후에 바로 책을 덮었다. 세계사같이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과목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디테일 ..
호수공원으로 가는 길에서 특정한 길목을 지날 때 마다 향기로운 꽃 냄새가 난다. 아빠한테 이게 무슨 냄새냐고 물었더니, 이건 라일락 꽃 향기라고 대답해주셨다. 옆으로 조금 가서 보니 분홍빛을 띄는 꽃들이 냄새를 풍기며 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얀색, 분홍색으로 얼룩진 라일락 꽃은 청순하고 참 예뻤다. 꽃이 너무 예뻐서 어떻게 찍어도 예쁘게 나올 것 같았다. 아빠는 어느새 이문세가 빙의되어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며~ “ 라고 흥겨운 노랫말을 부르며 저만치 가고 계셨다. 멋진 사진을 찍어서 아빠를 놀래켜 드리고 싶었다. 나는 카메라를 얼른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한참 꽃을 찍고 디스플레이로 사진을 봤는데 꽃이 예쁘게 나오긴 했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이 그냥 “이건 라일락 꽃입니다”라고 마치 설..
산책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 마다, 카메라 화면에 떠있는 “1/125, 1/250” 이 뭔지 항상 의아했었다. 설명서에 셔터 속도라고 명시가 되어 있었지만, 셔터에 한번 “깜빡!” 하면 사진이 찍히는 것이지, 무엇 하러 그 “깜빡!” 거리는 속도까지 조절을 해야 하나 싶었다. 평온한 일요일 아침에 산책길에 오른 나는, 아마도 날씨가 많이 포근해 져서 인지, 많은 사람들이 조깅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호수공원을 유유히 순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낯선 사람들이, 오늘 따라 자전거 타는 아저씨의 종아리 근육이 돋보였고, 한 발 한발 내딛으실 때 마다 씰룩씰룩 거리는 조깅하는 할아버지의 “노쇠하신 분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팔 근육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변태적인 동기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