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는다. 넓적한 플라타너스 잎들이 발아래에서 바스락거린다. 젊은 날 낙엽을 밟을 때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낭만을 즐기곤 했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낙엽 밟는 소리에 가슴이 시려 온다. 낙엽들이 서울시민보다 많을 것 같은 양재 시민의 숲을 걷는 중이다. “부아앙∼빰바∼.” 경부고속도로와 인접한 산책로 벤치에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온다. 자동차 소음과 섞여 들려오는 금관악기 소리에 까마귀가 깍깍 화음을 넣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청바지를 입은 중년 신사가 악보를 보며 트럼펫 연습에 한창이다. 수북이 쌓인 낙엽 앞에서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작년 말에 정년퇴직했다는 최덕하(64) 씨다. 30여 년간 교회 차량을 운행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마스크에 비옷까지 입은 사람들이 나무판에 연탄을 짊어지고 골목길을 오르고 있다.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이지만 온기를 나누기 위해 인천 문학산 자락 산동네에 모인 연탄배달 자원봉사자들이다. “연탄이 예쁘게 생겼어요.” 태어나 ‘실물연탄’을 처음 본다는 인채원(26) 씨가 동갑내기 단짝 안경원 씨의 얼굴에 묻은 검댕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대학 단짝인 두 사람은 입사한 지 한 달 된 초년생으로 사회 첫발을 내디디며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연탄이 생각보다 무거워 처음에는 두 장씩 옮겼는데 몇 번 해보더니 3장도 거뜬하다. 경원 씨는 연탄 배달을 하는 내내 아직도 연탄을 쓰고 계시는 외할머니 생각을 했다. 코로나19가 진정되면 외할머니를 꼭..
아름드리나무들이 형형색색의 뜨개옷을 입고 있다. 모양도 무늬도 각양각색이다. 초록 바탕 뜨개물 위에 별들이 반짝이고 아기 곰과 산타가 동심의 나래를 펼친다. 연꽃 모양을 수십 장 이어붙인 뜨개옷도 있다. 찬바람이 불고 거리에는 낙엽이 뒹구는 쓸쓸한 계절이지만 가로수들이 알록달록 옷을 입고 있는 인천 새말초 앞 도로는 나무들의 축제가 벌어진 듯하다. “손뜨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어요.” 교문을 빠져나온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경훈(45) 씨가 나무의 뜨개옷을 매만지고 있다. 낡고 오래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을 찾아 고민하던 정 씨는 평소 취미로 하던 뜨개질로 나무에 옷을 입히는 ‘트리니팅(trees knitting)’을 기획했다. 둘째 아이가 다니는 초..
‘칙칙폭폭’. 금방이라도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달려올 것 같다. 숨 막히는 일상을 뒤로하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걸음걸이로 철길을 걷고 있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레일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서울의 서쪽 끝자락 구로구 항동 기찻길이다. 산업화가 한창인 1959년에 준공돼 50년 넘게 산업화를 위해 그 소임을 다하고 지금은 시민들의 산책로가 됐다. “데이트 장소로 야외공원을 많이 찾아요.” 김현빈(38) 씨와 새리(29) 씨가 시원하게 뻗은 레일 위를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어학원에서 교사와 수강생으로 만나 3개월째 소위 ‘썸’을 타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다 보니 더욱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
어깨를 맞댄 구릉들이 어머니 품처럼 부드럽다. 장마와 태풍 속에서 알곡을 품어낸 밭들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라는 콧노래가 절로 날 것 같은 드넓은 밭에 아낙 대신 건장한 청년이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다. 콩과 보리로 ‘농촌의 희망’을 꿈꾸는 전북 고창의 청년 농부 한선웅(37) 씨다. 한 손에 낫을 들고 잘 여문 콩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 생기가 흘러넘친다. 젊다는 것 하나만 믿고 농사일에 뛰어들었다는 한 씨는 대학에서 조경을 전공한 후 개성공단 운영관리를 맡았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오랜 고심 끝에 전주에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고창으로 3년 전 귀농했다. “마을 사람들 보면 무조건 뛰어가 인사를 했어요.” 덕분에 이장님을 비롯한 마을 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