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함박눈이 내린다. 산과 들 그리고 꽁꽁 언 강물 위로 소복이 내려앉는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산하가 어느새 순백의 세상이 됐다. 눈발을 헤치며 누렁이가 앞서가고 지게를 멘 주인이 뒤를 따라 다리를 건너고 있다. 그 정겨운 모습에 왠지 모를 그리움이 일렁인다. 강원 영월군 평창강 판운리 섶다리 풍경이다. “내 별명이 지게 도사야. 하하하.” 설을 앞두고 다리 건너 이웃 마을에 다녀온다는 하창옥(74) 씨가 불콰해진 얼굴로 호탕하게 웃는다. 발채를 얹은 지게 위에는 짐이 가득하다. 젊을 때 지게질깨나 했다며 지금도 일을 할 때 지게가 요긴하단다. 신작로가 뚫리고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지만, 강 건너 이웃 마을에 갈 때면 이 다리가 제격이다. 강 건너 이웃집에서 약주 한잔 걸치고 산이(풍산개)와 함께 집으로 ..
북극발 최강 한파가 물러갔지만 냉기가 거리 곳곳을 배회하고 있다. 나란히 늘어선 하얀 천막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접수를 하고 체온을 재고 마지막 천막 앞에 선 사람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하다.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 앞에서 코와 입을 벌리고 검체를 채취한 후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우려 때문인지 무거운 표정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긴다. 코로나19 방역 최전선인 마포구 서강대입구역 임시선별검사소 풍경이다.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아요.” 레벨D 방호복에 마스크하고 페이스 실드로 무장한 한진희(25) 간호사가 검체 채취를 마치고 천막 밖으로 나오고 있다. 진희 씨는 신규 간호사로 병원 웨이팅 중 작년 9월부터 코로나 최전선에 투입됐다. 사회초년생으로 처음에는 방역의 최전선에 서는 일이 무섭고 긴장도..
잔설이 남은 산 한 모퉁이에 작고 여린 싹들이 얼굴을 내민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자신의 온기로 눈을 녹이고 있다. 산도 개울도 아직은 꽁꽁 얼어 모든 것이 숨죽인 듯하지만, 봄은 우리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다. 여린 싹을 보니 코로나19로 잔뜩 얼어붙은 우리네 가슴속에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기지개를 켜본다.
삶의 에너지가 바닥날 때면 회사에서 가까운 남대문시장을 찾는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의욕이 조금씩 생겨난다. 특히 시장 한가운데 있는 꽃상가는 늘 그윽한 향기로 나를 반겨준다. 그리고 이곳을 나설 때는 꽃 한 다발과 함께 미소가 배어나곤 했다. 코로나로 꽃시장이 급속하게 얼어붙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골 꽃집 아주머니가 계시는 남대문 꽃상가를 찾았다. “얘는 어떻게 해요?” “걔들 참 예쁘지요.” 수북이 쌓인 꽃들을 앞에 두고 꽃집 아주머니가 모처럼 찾은 손님과 나누는 대화가 정겹다. 마치 어린아이들 보듯이 사랑스러운 눈빛이다. 30년 넘게 이곳에서 꽃도매를 하는 최명숙(69) 씨다. 코로나로 졸업과 입학 시즌마저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다행히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
꽁꽁 언 논바닥에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썰매에 태워 빙판을 달리고, 젊은 아빠는 아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얼음을 지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예약한 세 팀만 이용할 수 있지만, 만국기가 휘날리는 얼음판의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꽁꽁 싸맨 몸에선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마스크 밖으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경쾌하다. 경기 양평 강상초 앞 논썰매장 풍경이다. “삼시 세끼 아이들 밥 해먹인 보람이 있네요. 호호호.” 어린 두 딸이 밀어주는 썰매를 타고 엄마는 마냥 신이 났다. 작은 의자 두 개를 이어 만든 썰매에 앉은 이 순간 엄마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처음에는 엄마가 아이 둘을 태우고 열심히 밀어줬다. 그렇게 몇 바퀴 돌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려 엄마가 힘들어하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