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돌돌 말려 있던 금계국 꽃봉오리가 찻잔 속에서 활짝 피어난다. 따뜻한 차 한 모금에 추위에 웅크렸던 몸이 살살 녹는 느낌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로 날아갈 듯 고개를 쳐든 작고 앙증맞은 솟대들이 작업실에 가득하다. 추위를 피해 전국의 새들이 여기에 다 모인 것만 같다. 웃음을 솟대에 실어 보내는 웃음치료사 송상소(60) 씨의 작업실이다. 방금 제작한 솟대를 보여주는 송 씨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가녀린 나뭇가지에 앉은 새 모양에 화사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5년 전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솟대에 마음이 끌려서 하나둘 만들어 보기 시작했었다. 그렇게 만든 솟대를 이웃에게 선물했더니 하나같이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때부터 솟대를 받는 이에게 항상 웃는 일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
텅 빈 해변에 구름만 가득하다. 드넓은 모래사장 너머로 바다와 맞닿은 하늘에 구름이 물결친다. 할매바위 앞 외로운 등대는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겨울 바다에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모든 모임은 취소됐고 어느 때보다 분주했을 송년의 거리는 적막하기만 하다. ‘감염’이라는 공포가 찬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면서 사람들은 더욱 움츠러들고 마스크 속으로 깊숙이 숨어들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내 기억 속에 일몰이 가장 아름다웠던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을 찾았다. “날씨도 코로나랑 같이 가는 것 같아요.” 코로나가 극성이니 하늘마저 우울해하는 것 같다며 문화관광해설사 홍경자(67) 씨가 인사를 건넨다. 관광객이 많이 와 가장 바쁘고 보람찰 때지만 올해는 그런 희망을 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됐을 때 잠시..
지족해협 죽방렴 위로 노을이 지면서 하늘과 바다가 붉게 타오릅니다. 고기를 가득 실은 작은 배가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매일 뜨고 지는 해이건만, 코로나로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서인지 세밑에 마주하는 일몰은 남다릅니다. 올 한 해 동안 겪었던 온갖 근심과 걱정과 고생일랑 모두 지는 해와 함께 저 바닷속으로 가라앉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정성을 다해 빌어 봅니다.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 산을 오르고 있다.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내 그림자가 한 발 앞서 가며 길을 안내한다. 눈을 들어 보니 빈 가지 사이로 드러난 투명한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 조금만 더 오르면 맑고 푸른 하늘이 손에 잡힐 것 같다. 어느새 마스크 속으로 스며든 차가운 공기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깨운다. 오르막이 끝나자 펼쳐지는 광활한 평원에는 황소바람이 반겨준다. 키 작은 나무들은 바람 부는 방향으로 비스듬히 누워 자라고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거센 바람을 맞으며 날개를 돌리고 있다. 파란 하늘 위에 하얀 풍차가 돌고 있는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세 명의 등산객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들의 뒤를 쫓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이 번쩍 들고 가슴이 후련해지네요.” 선자령 정상에서 김경호(65) 씨가 거친..
‘저리도 좋으실까.’ 밭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가 아들을 보자 반갑게 맞아주신다. 최근 넘어져 발을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근심스러운 마음에 시골집으로 향한 길이었다. 오른쪽 발목에 깁스를 하고도 무와 함께 춤이라도 추실 기세다. 언제 심어 놓으셨는지 밭에는 배추와 무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해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머니의 걱정이 하나 늘어난다. 김장 때문이다. 집안 연례행사 중 김장은 상위권에 속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날짜가 정해지면 그날은 애·어른 할 것 없이 가족들이 총동원돼 시골집에서 김장을 했다. 김장은 단순히 김치를 담그는 그 이상의 의미가 가족들에게 있었다. 자식들은 추석 이후 한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됐고, 어머니에게는 당신이 힘써 지은 배추농사로 자식과 이웃에게 김장김치를 나눌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