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어느 해부턴가 아버지 무덤가에 하나둘 피어나던 구절초가 올해는 무리 지어 피었습니다. “참 좋다.” 밭에서 일하다 고단한 허리를 펴시고는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며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키가 크신 아버지처럼 아홉 마디 훌쩍 자란 구절초가 하늘을 우러르며 활짝 웃고 있습니다. 구절초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은은한 구절초 향기가 아버지 넋이 되어 헛헛한 내 마음을 다독여줍니다.
마스크를 잠시 벗고 긴 숨을 들이쉰다. 공기가 제법 선선하다. 구절초 틈에서 철 지난 망초 꽃들이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파란 가을 하늘을 우러른다. 재활치료를 통해 유기견에게 새 삶을 불어넣어 주는 경기도 도우미견나눔센터를 찾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파란 조끼를 입은 훈련사와 호리호리한 개 한 마리가 훈련을 하고 있다. 김지연(26) 훈련사와 이탈리안 그레이하운드 ‘산토’다. 지난 5월에 안산보호소에서 이곳으로 온 산토는 발견 당시 오른쪽 골반뼈가 부러져 있었다. 바로 수술했으면 치료할 수 있었지만 유기된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돼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도 한쪽 다리가 불편해 강아지용 짐볼 등을 이용해 훈련을 받고 있다. 이곳에 온 유기견들은 한두 달 훈련을 거쳐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분양돼..
사각사각, 사각.’ 학생들이 왁자지껄 집으로 돌아간 고요한 교실에는 연필 소리만 가득하다. 학생 한 명이 교실에 남아 무언가를 적느라 열심이다. How do you go to school? 하우 두 유 고 투 스쿨? I go to school by car. 아이 고 투 스쿨 바이 카. 중3 김현희(62) 학생이 영어 단어에 우리말을 달며 숙제를 하고 있다. 입학 당시만 해도 까마득했는데 조금씩 말문이 트이고 외계어 같은 영어 글씨가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던 동네 영어 간판들이 슬슬 말을 걸어왔다. “마구 가슴이 뛰는 기라예.” 자원봉사를 갔다가 우연히 모집공고를 보았던 때를 떠올린다.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중학교 과정을 모집하는 공고였다. 오래전 잊어버렸던 꿈이 꿈틀대기 시작..
가을 들녘에 시름이 깊다. 가장 길었던 장마와 연이은 태풍에 멍든 농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그 어느 해보다 맑고 푸르다. 두 차례 태풍이 지나간 후 사과농사를 짓는 지인을 찾아 경북 영주 안남마을로 가는 중이었다. 마을 들머리에 들어서니 늘 아름답던 가을 풍광은 찾아볼 수 없다. 매년 이맘때면 마을 입구부터 사과나무들이 크리스마스 트리같이 붉은 열매를 달고 한바탕 가을 축제를 벌이던 곳이다. “하늘이 우리를 버린 기라예∼.” 25년째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노홍석(55) 씨가 낙과를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나무에 달려 있어야 할 붉은 사과들이 땅에서 뒹굴고 있었다. 가지에 듬성듬성 달려 있는 사과들도 생기가 없다. 소백산이 큰바람을 막아주고 맑은 날이 많아서 이곳 사과는 웬만한 태풍에도 끄떡없..
달덩이 같은 호박이 해먹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양파 망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딴 애들은 땅바닥에 뒹구는데 “저 호박은 좋겠다!” 하자 어머니 하시는 말씀. “큰 덩치에, 매달려 있으려면 얼마나 힘들겠냐! 그것들도 한 식군데…….” 구수한 호박잎과 애호박도 잘 먹었는데 찬바람이 나니 따끈한 호박죽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 호박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 다 내어주면서 늙어가는 어머니를 닮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