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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매년 이맘때면 송이고장으로 불리는 고성군 죽왕면과 토성면 일대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외지로 나간 가족들이 돌아와 송이를 지키기 여념이 없었다. 다리 힘만 있으면 이산 저산을 오르내리며 쉽게 돈을 벌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화마가 모든 것을 쓸어간 이곳의 가을은 황량하기만 하다. 앞으로 30년은 족히 기다려야 이곳에서 송이를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간첩출몰 등으로 혼란스런 가운데 이곳의 가을은 산촌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며 그렇게 쓸쓸히 찾아왔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자 숯덩이 잿덩이가 된 산에서 토해내는 검은 흙탕물이 계곡을 타고 흐른다.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고 나무그늘 하나 없는 고성의 불탄 숲에는 새도 곤충도 아무 것도 없다. 간혹 떠돌던 구름이 만든 그늘이 유일한 쉴 곳이다. 홍수조절 기능을 갖고 있던 입목이 모두 소실되어 산사태를 우려하는 주민들의 걱정이 태산이다. 당국에서는 피해목을 정리하고 산지 사방작업으로 연이은 피해를 막으려 한간힘을 쓴다. 그러나 점성이 약한 마사토가 많아 태풍이 비켜가기를 하늘에 빌뿐이다.
1996년 4월 23일 12시 22경 강원도 고성의 야산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군부의 폭발물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산불은 폭발물의 위험이 산재해 있는 발화지점의 특별한 지형적인 여건으로 초기진화에 실패하였다. 단순한 화재로 생각되었던 산불은 때마침 불어오는 강풍과 어우러져 춤을 추듯 이산 저산으로 옮겨 다니며 산림과 가옥 등을 초토화 시켰다. 사흘 낮과 밤 기승을 부리던 불이 진화되었을 때 북으로 금강산과 남으로 설악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주요 길목인 고성군 죽왕면, 토성면 일대가 시꺼먼 숯덩이로 변하였다.
설악산 미시령 고개를 넘어 고성땅에 들어서면 늘 가슴이 설렌다. 아무런 이유없이 마음이 분주해지고 발길도 덩달아 빨라진다. 해안도로를 따라 그냥 지나치려고 바다로 눈을 돌리지만 마음뿐이지 어느덧 검은 숯덩이 산속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7년째 버릇처럼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아마도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내 가슴 속에 박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96년 4월 26일. 거침없이 이산 저산을 날아다니고 있는 불덩이들---.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강원도 고성에서 목격했다. 그 불덩이는 동해의 파도보다 더 큰 기세로 마을을 집어 삼켰다. 금강과 설악을 잇는 백두대간의 푸른 소나무들이 그 기세 앞에 앙상한 몰골로 변하고 있었다. 그 불덩이는 그렇게 사흘 밤낮 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