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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나는 대한민국 고3이다. 공부만이 내게 허락된 일이라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공부만 하고 살까. 하지만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나는 대한민국의 어느 고3가 마찬가지로 책상->식탁->변기의 경로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점수는 점수대로 안 나오고,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쌓이면서 피부도 안 좋아지고 짜증만 늘었다.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났지만, “왜 이러고 사나” 싶어서 침대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였다. “준우야, 아빠랑 산책이나 다녀올까?” 하고 아빠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셨다. 머리는 “공부 해야 돼!!” 라고 연신 소리를 질렀지만, 이상하게 가슴은 갑자기 쿵쾅거리며 아빠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렇게 아빠와 산책을 나간 건 정말..
일산으로 이사 온 지 10년이 되어간다. 생명을 주제로 사진작업을 하던 나에게 이곳은 천국이었다. 꽃다지, 냉이, 별꽃등 봄이면 어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꽃부터 화려한 향기를 뽐내는 목련, 벚꽃, 수수꽃다리등 사계절 찾아드는 자연의 친구들을 벗하며 그것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업은 내 삶의 소중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하늘, 호수, 나무, 꽃...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산책을 나설 때 마다 같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다르고 새벽과 아침, 저녁의 모습이 다 달랐다. 그 산책길에는 지금은 대학생이 큰 아이부터 중학생이 된 막내아들까지 식구들이 동행하곤 했다. 아내와의 산책길에는 늘 아이들 커가는 문제가 화재로 등장했고 집안문제도 빠지지 않고 대화메뉴로 등장했다...
산딸기 익을 무렵 / 나희덕 아기를 들쳐 업은 한 여자의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보았네 숨어서 익어가는 산딸기를 숨어서 도란거리는 지붕들을 입맞출 수도 없이 낮은 곳에 피어나 잎새 뒤에 숲 뒤에 숨은 작은 마을을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그 울음에 산딸기 좀더 익으면 땅거미가 내려와 붉은 열매를 감추는 저녁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들었네 산딸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무사하라 무사하라 부르는 그 노래를 녹슬어가는 함석 지붕 아래서 나는 들었네
한 포기의 집/나희덕 장마가 들이닥치기 전 배추를 거두려고 서두르는 손 잎을 들출 때마다 한 포기씩 뽑힐 때마다 수룩수룩 딸려나오는 목숨들, 잎부터 뿌리까지 한 틈바구니도 남기지 않고 푸른 지붕 아래 오글오글 정들어 살던 온갖 날것과 기어가는 것들이여. 한 목숨에 붙은 목숨들 이리도 많다니! 한 포기의 배추가 실은 한 채의 집이었다는 걸 안다 해도 장마 오기 전 서두르는 손들, 더 멀리 날아가는 날개들, 흙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작은 발들.
삿대 저어가네/정끝별 눈먼 나뭇가지 꺾어 저어가네 가지가 물에 잠기면 물살을 가지고 노는 배의 몸 잠기면 나아가고 나아가며 들어올려 미끄러지듯 길을 열고 봄의 배가 힘겹게 몸 가누는 동안 간신히 뻗어 강의 마음을 받쳐드는 저 삿대의 손 봄의 배가 힘겹게 제 몸 견디는 동안 묵은 강의 바닥을 어루만지는 저 삿대의 마음 구르는 강바람에 살끝이 닳아버린 안개는 눈물 자욱 깊은 강기슭에서 웅크려 떨다 강 건너 청미래 덩굴숲을 눈멀게 하고 세월아 네월아 오뉴월을 건너는 눈먼 배야 강 건너 푸른 방 한 칸을 향해 저어가니? 삿대 저어 나를 저어가니?
저무는 서해에서/정끝별 서쪽으로 난 세상 비탈에 허물어지는 해의 살빛으로 세운 계단 백만 갈래의 길을 품은 채 백만 골의 이랑을 물들이고 어두워지는 뭍의 풍경을 등에 지고 걷다보면 일렁이는 불길 층층이 젖은 길들이 밟히고 화근의 해가 지면 바다의 주름을 잡아당기자 뭍의 기다림들은 아코디언 소리를 내며 퍼진다 연하디연한 기억 안쪽이 아프게 접힌다 미끈, 발밑이 습곡처럼 주저앉는다 또 내일이면 바다의 계단이 하나 늘어나고 검게 탄 뭍의 길이 하나 떠오를 게다 찌걱이며 빠져나가는 길의 무덤에서 쓸쓸한 서해에서 저 붉은 소멸의 사원에서 소년들은 타오르는 시간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흥건하게 비린 길들을 캐고 있다
연초(煙草)무는 시간/이진명 지금 여기 연초 무는 시간 한여름 오지의 촌로 대궐문처럼 열어 논 대문 그 안켠 짙디짙은 그늘 속에서 연초를 물고 오직 듣는다 지워진 귀로 지워진 귀로 끓어오르는 햇빛의 대답 짙디짙은 그늘을 짙디짙은 그늘의 대답 끓어오르는 햇빛을 그러나 같이 듣는다 한손이 올려짚은 깡깡한 지팡이와 두발 살금 빼 디딘 검정고무신과 대문 밖 고추밭 속 고추의 새빨간 눈 몇은 뮛도 모른 채 촌로의 손가락새로 피어오르는 연초연기를 맵도록 맵도록 잡고 있다 잡을 수 없는 그 한 생의 연기를
꿈길/이진명 어머니, 무량한 빛 쬐며 꿈길을 오시네 겹겹 희디흰 잔꽃송이 발을 넘어 광활한 꿈길을 생전처럼, 어머니 무겁고 아팠을 남색 보따리 높게 머리에 이고 얼굴 다 태우고 가시고도 무엇을 이고 오시나 뜨겁게 이고 오시나 감자나 떡, 옥수수와 메주콩 같은 양식거리를 무량한 빛 쬐며 옛 어머니, 가신 어머니 언제 도착하시려나 그러나 가벼이 두 손은 가벼이 놓으셨네
노을을 적다/천양희 노을이 저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 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 저것뿐이다 저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