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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세상
시외버스를 타고 / 이상희 내 가을은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과 타향 사이 국도를 무겁게 흔드리는 진자(振子), 감지도 뜨지도 못하는 눈을 차창에 대면 부부부 날선 햇살을 뭉개고 섰는 억새 으악새가, 에고에고 한평생 울 일 없는 허수아비가, 오색 찬란한 산빛보다 먼저 앞을 가로막고 나는 가만히 앉은 채로도 발이 퉁퉁 붓도록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이제 기나긴 밤의 날들이 오고 폭설이 내리고 우리의 가난도 일직 잠들겠지요 슬픔도 진자도 멈출 것입니다.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냐 하나 / 김명리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 이 한 장의 스냅사진 속의 역광에 쓸리는 가을 산빛 한낮의 졸음처럼 때아닌 설움처럼 숨통에 하나 가득 대번에 몰려오는 이 뭉클함 사람의 한 생애를 사무치게 버팅기는 이 산빛 이 물 빛 이 바람 속을 산그늘이 풀어헤친 비밀한 행낭의 어디, 어디쯤이라고 말해야 하나 어쩌면 여기쯤에서 머무르고 싶다고 말해도 좋으리 한 마지기 하늘의 수줍은 논배미 속으로 탕탕히 내다거는 씨옥수수 생량머리 바람이 주저 없이 얼싸안는 저 나이테 면면한 세월의 요만한 남루쯤이야! 단숨에 내달려가 와락 안기고 싶은 괄게 지핀 인정의 훗훗한 아궁이 속 같은 여기, 여기쯤을 내 마음이 닿고 싶은 고향이라고 말해도 좋으리 꽉 다문 입술로 사랑이라 말해도 좋으리
갈대를 위하여 / 강은교 아마 네가 흔들리는 건 하늘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키 큰 바람이 저 쪽에서 걸어올때 있는 힘 다해 흔들리는 너 연분홍 살껍질을 터뜨린 사랑 하나 주홍빛 손을 내밀고 뛰어오는 구나 흔들리면서 그러나 결코 쓰러지지는 않으면서 흔들리면서 그러나 결코 끝나지는 않으면서 아, 가장 아름다운 수풀을 살 밑, 피 밑으로 들고 오는 너 아마 네가 흔들리는 건 흔들리며 출렁이는 건 지금 마악 사랑이 분홍빛 손을 내밀었기 때문일 것이다.
멈춤 혹은, 맺힘/ 강신애 잎사귀가 수십 캐럿짜리 금강석을 받아들였다 느꼈는가 초록의 무게를 물방울이 그물맥 융단을 몸 속으로 펼쳐놓았다 보았는가 단단한 섬광을 시간이 우리를 감싸안았을 때 노래가 터져나왔다 화살에 적중한 과육처럼
물안개/ 이수명 너를 거기 두고 사람들 속에 사람들의 집과 집 속에 두고 나는 빠져 나온다. 벌집 같이 우리가 짰던 시간의 그물 속에 이제는 잠든 그 촘촘한 집 속에 너를 거기 두고 나는 잊어 버린다. 너를 감추기 위해 나도 모르는 곳에 너를 숨기기 위해 나는 이 곳을 떠나려 간다. 물안개가 되어
감 / 강은교 얽힌 길 풀어, 풀어 돌아왔네 ___ 이 빛 바드시오 ___ 이 빛 바드시오 그대 목소리 어디에선가 들려 ___ 이 빛 바드시오 ___ 이 빛 바드시오 따순 허공에 주홍빛 뺨 문지르는 기쁨의 속가슴 뒤 돌아왔네 얽힌 길 풀어, 풀어.
나는 황소처럼 느리게 갈 것이다 / 신현림 잠시라도 느슨해지고 싶어 푸른 정자처럼 앉아 강물을 굽어본다 가장 풍요한 방식으로 마음을 눕혀 벽이란 벽 문이란 문 다 열고 귀와 눈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 다 열면 바람이 난지 내가 바람인지 모른다 스피드가 다는 아닌데 세상이 얼마나 빨 리 흐르는가 스피드는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여운없는 삶이란 얼마나 메마른가 당신은 빨리, 빨리, 빨리, 외치며 달려도 나는 황소처럼 느리게 걸을 것이다 땅에 입맞춤하며 느리게 모든 것을 음미하며 느리게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신현림 배가 고프면 밥지어 먹고 쓸쓸해지면 달무리에 감싸인 달처럼 당신 팔에 휩사여 깊은 잠을 자리 가슴의 갈대밭에 달아오르는 당신 심장 그 아늑한 노을을 느끼며 함께 있는 것에 새삼 놀라리 가슴 속으로 산비둘기 한 마리 날아오면 밤새도록 눈이 내린 길을 보며 나는 일어나 다시 살리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함박눈 다음/김혜순 해마다 성탄절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새 아기 한 분씩 방문해 오듯이 해마다 겨울날 어느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첫눈송이들이 방문해온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눈이불 아래 누워서 강을 묶어놓은 얼음 얼음짱 밑의 물고기들 그 겨울 물고기들의 조용하고 조용할 밀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눈사태가 빰을 치고 지나간 산머리 그 아래 숨죽인 도토리 눈뜨고 잠든 뱀 네 활개를 쫙 벌린 개구리 눈뜨고 기다리는 수많은 눈동자, 눈동자 그 조용하고 조용할 흰눈이불 속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아침 눈 이불 속에서 아이구 저 아기를 어쩌나 아장거리며 내려노는 내 어린 시절 옹알이하며 다가오는 아기를 맞이한다 눈뜨고 꾸는 꿈속에서처럼 내 품으로 다가오는가 팔 벌리면 어느새사쁜..
배달의 기수/ 김혜순 서울에 살면 태양도 배달온다 구름도 배달온다 바람도 배달온다 나는 오늘 창문을 열고 퀵 서비스로 도착한 눈보라를 풀어본다 정오엔 삼척에 사시는 엄마가 보낸 깊은 바다가 도착했다 여기가 깊은 바다 속 어느 집 안방이냐 심해에서 온 게들이 두 눈을 껌벅인다 잠결에도 드리는 집 앞에 오토바이 멈추는 소리 누군가 겨울밤을 집집마다 부려놓고 가는 소리 아무도 받아주지 앉자 택배 꾸러미를 박차고 나온 초승달이 미끄덩거리며 비상계단을 오르는 소리 식반을 머리에 인 아저씨가 빈 그릇 내 놓으라 주먹으로 대문을 꽝꽝 두드리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