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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자식들 김장해 주고 싶어”… 엄마 몸부터 챙기셨으면

빛으로 그린 세상 2020. 12. 11. 15:32

‘저리도 좋으실까.’

밭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가 아들을 보자 반갑게 맞아주신다. 최근 넘어져 발을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근심스러운 마음에 시골집으로 향한 길이었다. 오른쪽 발목에 깁스를 하고도 무와 함께 춤이라도 추실 기세다. 언제 심어 놓으셨는지 밭에는 배추와 무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해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머니의 걱정이 하나 늘어난다. 김장 때문이다. 집안 연례행사 중 김장은 상위권에 속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날짜가 정해지면 그날은 애·어른 할 것 없이 가족들이 총동원돼 시골집에서 김장을 했다. 김장은 단순히 김치를 담그는 그 이상의 의미가 가족들에게 있었다. 자식들은 추석 이후 한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됐고, 어머니에게는 당신이 힘써 지은 배추농사로 자식과 이웃에게 김장김치를 나눌 수 있는 보람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장은 그 과정 하나하나가 간단치 않다. 전날부터 배추와 무를 뽑아 씻고 소금에 절이고 밤새 무채를 썰어야 한다. 갖은 양념을 준비하는 것도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장을 그만하자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든을 넘기시고도 고집스럽게 김장을 이어갔다. 고심 끝에 작년 이맘때쯤 김장을 마치고 자식들이 꽃다발과 감사패를 준비해 어머니에게 ‘김장 은퇴식’을 열어드렸다. 평생 가족을 위해 김장하느라 애쓰신 어머니의 노고에 감사하고 이제는 그만하고 편히 쉬시라는 의미의 이벤트였다. 그러나 올해도 어머니는 어느 틈엔가 시골집 밭에 배추랑 무를 심어 놓으셨다. 어머니의 ‘김장사랑’은 아무도 못 말린다.

“목숨 붙어 있는 한 내 손으로 김치를 해주고 싶어….”

깁스한 다리를 쭉 뻗은 채 무채를 써시던 어머니가 나직이 말씀하신다. 기력이 날로 쇠약해지신 어머니가 걱정돼 김장을 말렸지만 다시는 ‘엄마표 김치’를 먹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도 컸었다. ‘저도 어머니 김치 오래오래 먹고 싶어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울컥하는 마음에 목이 메었다. 어머니의 노고와 정성으로 버무려진 ‘엄마표 김치’는 힘들고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아 준 삶의 버팀목이었다. 말없이 어머니의 손을 꼭 잡자 거북등처럼 거칠어진 손등 위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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