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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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젊은 사과나무에 영그는 희망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10. 17:00

 경북 영주시 안남마을에서

나무들이 붉은 등불을 주렁주렁 달고 서있습니다.
일제히 불을 밝히고 즐비하게 늘어선 사과나무들이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같아 황홀합니다.
유난했던 날씨로 많이 힘들었지만,
나무들은 한바탕 가을 축제를 벌입니다.

 

가을 들녘을 걸어갑니다. 벼이삭들이 누렇게 영글어가는 논배미를 지나갈 때면 구수한 벼 냄새가 풍겨옵니다. 사과나무 밭에는 나무들이 탐스런 열매를 달고 서있습니다. 그 곁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사과 익어가는 소리가 사그락 사그락 들릴 것만 같습니다. 자연의 풍요로움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그래서 힘들고 외로울 때면 가을 들판으로 달려가곤 하지요. 하지만 지난여름의 유난했던 날씨 때문일까요. 태풍과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낸 아픔이 저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애잔해집니다.

#가을이 익어가는 사과마을
경북 영주시 단산면 안남마을. 마을은 온통 사과나무 밭입니다. 마을길을 걷다가 어느 사과밭을 기웃거립니다. 젊은 나무라고 해야 할까요. 쭉쭉 뻗은 가지마다 붉은 사과가 빼곡하게 달려 있습니다. 줄지어선 나무들이 열매를 그득히 달고 있는 풍경 뒤로 가을 하늘은 높푸르고 저 멀리 소백산은 단풍으로 물들어 갑니다. 그 경치에 반해 울타리도 없는 과수원을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사과나무만큼이나 젊은 부부가 사과를 따고 있습니다. 노흥석(45), 정명순(40) 부부입니다.
“과수원이 너무 예뻐서 들어왔어요...” “어서 오이소, 이놈 한번 맛보이소”
부인 정씨가 먼저 잘 익은 사과 하나를 따서 먹어보라고 권합니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자, 아삭아삭하고 달콤한 사과 맛이 입 안 가득 고입니다.

“소백산이 태풍을 막아 주니께 그래도 다른 데보다는 나은 편이지예..” 올해 농사를 묻는 말에 답하는 노씨의 표정이 담담해보입니다. 소백산이 큰 바람을 막아주고 맑은 날이 많아서 이곳 사과는 당도가 뛰어나기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올해는 작황이 좋지 않습니다. 지난여름부터 가을까지 날씨는 참으로 모질었습니다. 타는 듯한 가뭄과 무더위가 이어지더니 가을 들어 몇 차례의 태풍과 잦은 비로 일조량이 턱없이 부족했고 그래서인지 꽃매미와 나무좀벌레가 더 극성을 부렸지요. 사과농사 20년 만에 이런 날씨는 참 처음이다 할 정도였습니다.

한반도의 온난화는 이제 피부로 절실히 느껴집니다. 이상기후와 더불어 날씨까지 더워져서 사과를 키우는 게 걱정입니다. 강원도 평창 등지에서 사과를 본격적으로 재배한다고 하니 경북사과 자리를 강원도 사과가 대신하게 되는 건 아닌지요. 그래서 그는 작년에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올해 처음 수확을 했는데 단산포도축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당도가 뛰어납니다. 소백산자락에서는 일교차가 커서 사과도 포도도 익어가는 과정에서 단맛이 많이 든다고 합니다. 물살이 센 바다에서 잡히는 고기의 맛이 뛰어나듯 밤과 낮의 극심한 기온 차이를 견디어낸 과일이 더욱 맛이 좋은가 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태풍이 부는 밤이면 노씨는 잠들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몇 번이고 사과밭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소백산으로 달려갑니다. 어려서부터 소백산을 누비던 그에게는 밤에도 산 구석구석이 손금을 보듯 훤합니다. 그래서 소백산에서 조난신고라도 들어오면 언제라도 뛰어 가는 그입니다. 전국의 산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산을 좋아하는 그는 아예 소백산 국립공원의 산림요원으로 나섰습니다. 한 달이면 20일을 근무하는 남편 때문에 포도 봉지 싸는 것부터 사과나무 돌보는 것까지 나머지 일들은 고스란히 부인 정씨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내친 김에 포도밭도 따라가 보았습니다. 달큼한 포도향이 먼저 반깁니다. 비가림을 한 포도나무에도 한 해 동안 땀 흘린 결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노씨의 노모와 함께 아이들이 포도 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인 큰딸 윤슬과 중학교 2학년인 아들 윤혁입니다. 포도상자를 조립하던 윤혁과 포도송이를 상자에 담던 윤슬이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합니다. 노씨 부부가 이곳으로 이사 와서 윤슬이를 낳았다고 하니 벌써 18년입니다. 부부는 아이들 어릴 때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부터 가르쳤습니다. 만날 때마다 꾸벅꾸벅 인사하는 아이들의 손에는 늘 용돈이며 주전부리가 쥐어지곤 했습니다. 노인들만 남아 있는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은 온 동네 어른들의 손자로 자랐습니다.

“포도도 한번 잡숴봐~ 우리 며느리가 이거 다 한거여, 일잘하고 어른 잘 모신다고 동네 사람들이 죄다 칭찬혀”
올해 78살인 노씨 어머니는 오십 살 때 돌아가실 위기를 넘겨서 막내아들에게는 늘 애틋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환갑까지라도 사시면 좋겠다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에 아들은 어머니 칠순 잔치 때 아낌없이 해 드린 게 두고두고 뿌듯합니다. 그런 어머니가 며느리만 칭찬하십니다. 농사일도 안해 보고 상주에서 직장 생활하던 아가씨였는데 시집와서 과수 농사일에 아이들 키우랴 살림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예쁜 며느리입니다. 노모를 모시면서 제사도 지내고 있어, 이번 추석에 형제들이 모두 막내집에 모였었습니다.

#그대가 희망입니다
마을에는 과수원에 울타리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몇 개쯤 따먹는 건 인정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의 사과밭으로 다시 가보았습니다. 사과 나무아래에는 노란 민들레꽃들이 만발해서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제초제를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환경인증을 받았지만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화학비료 대신 나무껍질과 남은 열매 등을 이용하여 직접 유기비료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약을 치는 횟수도 줄이고 농약을 대신해서 병충해를 줄일 수 있는 친환경적인 약제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추석 때 사과 값이 워낙 올라서 수입이 괜찮았느냐는 질문에 노씨가 고개를 흔듭니다. 그는 농협으로 출하하지 않고 대부분 직거래로 파는데, 늘 믿고 다시 찾는 손님들한테 시세대로 가격을 올릴 수 없어서 매년 같은 가격을 받습니다. 그래서인지 입소문을 듣고 주문이 늘어나 모두 직거래로 팔 수 있었습니다. 당장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그의 모습이 참 당당해보였습니다. 늙은 사과나무를 베고 다시 사과나무를 심은 지 5년째, 그는 내년부터 본격적인 사과 수확을 기대하면서 앞으로 억대 연봉의 농부가 되는 꿈을 조심스레 내비칩니다.

벼농사보다 몇 배로 손이 간다는 사과농사, 이상 기후에 병충해에 어려움도 많고, 또 집안일에 아이들 키우랴, 산악구조하고 마을일 하랴 힘들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주어진 결실에 감사하고 이웃에게 넉넉한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울적해서 떠나온 가을 여행에서 자연이 주는 풍성함을 기대했지만 사람이 주는 넉넉함은 더욱 절절했습니다. 태풍과 비바람을 견디어낸 아픔이 들어 있기에 저 결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주어진 고통을 잘 견뎌가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견뎌가는 아픔만 생각했는데 그것이야말로 단맛이 나고 무르익는 성숙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점점 멀어지는 마을에 나무들이 붉은 등불을 주렁주렁 달고 서있습니다. 가을빛이 물들어가는 들판과 산기슭에 일제히 불을 밝히고 즐비하게 늘어선 나무들이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같아 황홀합니다. 모진 날씨로 채소도 과일도 작황이 좋지 않아 모두들 시름에 빠져있지만 나무들은 한바탕 축제를 벌입니다. 병충해에 나뭇가지가 말라비틀어지고 비바람에 열매가 무수히 떨어져도 마침내 남은 결실들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찬란하게 빛납니다.


글 최경애 (수필가) / 사진 김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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