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그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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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서/Nature & Mind

비양도의 숨비소리

빛으로 그린 세상 2017. 7. 10. 16:49

- 제주 한림읍 비양도에서

손에 잡힐 듯
그림처럼 떠 있는 섬,
남루한 일상이나 고단한 세상일은 모른다는 듯,
무심히 떠 있는 섬,
바다에 가로막혀 꿈결처럼 아련한
그 섬에 가고 싶다.

 

흰 포말을 일으키며 배는 바다로 나아간다. 짭짤한 바람이 온몸에 휘감긴다. 한림항에서 비양도로 가는 배를 탔다. 고기잡이배만큼이나 작은 배이지만 휴가철이라 사람들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제주에 살면서 비양도로 피서를 간다는 가족들도 많았다. 처음 가보는 비양도는 제주 사람들에게도 미지의 세계이고 배를 타고 가야하는 섬 속의 섬이리라. 봉긋한 오름을 품은 섬이 조금씩 다가온다. 오름 위에 흰 등대가 희미하게 보인다. 협재 해수욕장에서 늘 손짓하던 신비의 섬, 사람들이 마음으로 그리던 미지의 세계는 불과 15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주의 원형을 간직한 섬
한가로이 늘어선 고기잡이 배, 그물을 가득 부려놓고 손질하는 나이 든 어부,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 포구에는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단순한 삶의 풍경들이 한없이 펼쳐진다. 선착장 앞에는 낮게 엎드린 집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섬에 유일한 마을이다. 손님을 마중 나온 민박집 주인이 손수레에 짐을 싣고 골목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가만히 보니 섬을 통틀어 차가 다니지 않는다. 앳된 순경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고, 할머니들은 게와 조개를 실은 유모차를 끌고 느릿느릿 걸어간다. 

능소화가 핀 비양분교를 지나 섬을 한 바퀴 도는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바닷가에 바위들이 유난히 거칠고 까맣다. 물기가 하나도 없이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 위에 푸릇푸릇한 땅채송화들이 무성하다. 길섶에는 잎이 둥글납작한 백년초 선인장 군락에 노란 꽃이 수없이 피어있다. 바닷물이 스며들어 만들어진 펄랑못 주변에도 해녀콩 같은 염생식물들이 온통 푸르다. 척박한 땅이나 거친 바위에서 자라는 것도 힘겨울 텐데 넘실거리는 바닷물과 거센 바람까지 견뎌내는 강인함이라니, 그 생명력이라니 …….

펄랑못을 지나자 용암이 부글부글 끓다가 금방 굳어버린 듯 우락부락한 돌들이 바닷가에 가득하다. 바다에 코를 박고 서있는 코끼리바위도 있고 애기를 업고 있는 ‘애기업은돌’도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애기업은돌은 용암이 흐르다 위로 솟구쳐 그대로 굳은 ‘호니토’로  비양도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한반도의 마지막 화산섬인 비양도는 육지와는 완전히 다른 화산섬만의 독특한 자연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비양도 해녀 할망
“할머니, 뭐 잡으세요?” 섬을 한 바퀴 돌아 선착장으로 걸어가다가 바닷가에서 작업하는 할머니들을 보았다. 까만 돌 틈을 뒤져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김순선(81) 할머니가 대답 대신 바구니에서 게와 조개를 보여주며 빙그레 웃으신다. 그제야 바위 사이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비양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는 팔십이 넘은 지금도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 할망이다. 이날은 몸이 좋지 않아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에 고생 많이 했지, 죽은 사람들도 많고…….”
김할머니는 열여섯 살에 물질을 시작했다. 일제의 수탈이 극심했던 시기라 해녀들이 힘들게 잡은 전복이며 소라들을 거의 빼앗기다시피 했다. 또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할머니 또래들은 일찍 결혼을 하거나 피신을 해야 했는데 할머니는 중국으로 피신을 갔다. 6.25 전쟁이니 4.3 이니 해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그 북새통에 피난 내려온 이북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그가 다시 돌아갈 때 그녀는 차마 부모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이미 뱃속에서는 어린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홀로 딸 하나 키우며 살아왔다.

“저승 돈 벌어와 이승 자식 뒷바라지한다는 말이 있어..” 깊은 바닷속은 해녀들에게 저승이다. 숨이 턱에 차오르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르면 별별 생각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 짧은 인연이었던 남편, 평소에 잊고 지내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매순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된 일이지만 딸 뒷바라지에 힘든 것도 몰랐다. 하지만 딸에게만은 해녀일을 절대 물려주지 않았다. 딸은 이제 시집가서 제주시에 살고 있고 할머니는 지금도 비양도 앞 바다에서 물질을 한다. 자식한테 손 벌리지 않기 위해서다. 골다공증에 고혈압에 다리, 허리 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 365일 약을 한 움큼씩 입에 털어 넣으며 바다로 들어간다.

#그들이 살고 있었네
낮은 돌담 너머로 해녀옷과 그물들이 걸려있는 마당, 조붓한 텃밭, 그리고 곧 이어지는 오름……. 이제야 삶의 풍경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땅이 좁고 척박해서 바다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섬에 마을 아낙 대부분이 해녀들이다. 사진 찍지 말라던 어느 해녀의 거친 목소리를 이해할 것 같다. 숨을 참으며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야 하는 고된 일을 마냥 신기하게만 바라보는 관광객들의 시선이 불편했으리라. 혼자서 보말죽을 끓여내고 반찬을 담아 나르고 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하느라 눈코 뜰 새 없던 아름이네 식당 주인도 떠오른다. 관광객들에게 이곳은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그들에게는 매일 치러내야 하는 맹렬한 삶의 터전인 것이다.

나무 계단을 지나 풀숲을 헤치며 비양봉을 오른다. 협재해수욕장과 금능 해수욕장이 보이고 구름에 가린 한라산이 보이고 사방에 펼쳐진 에머랄드빛 바다가 보인다. 비양봉 정상에는 하얀 등대가 바람을 맞으며 서있다. 협재 해수욕장에서 바라보이던 비양도는 사람들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아니었다. 또 다른 누군가의 역사가 스며있는 삶의 근거지였다. 땅은 척박하지만 천혜의 자연이 있고 풍요로운 바다가 있는 곳, 바다에 가로막혀 외로운 유배지, 그리고 일제의 수탈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섬, 그곳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해녀들의 애달픈 숨비소리가 있는 비양도는 제주 본섬이 잃어가는 제주 본래의 자연과 삶과 아픔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산다는 것은 녹록치 않다. 외롭고 고달프기도 마찬가지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숨막히는 일상을 떠나온 여행이었다. 그림 같은 섬에서 고즈넉하게 여유를 즐기는 것을 기대했지만, 나는 이곳에서 매순간 삶과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어떤 삶의 진실을 마주했다. 고된 만큼 정직하고 외로운 만큼 정이 넘치는 그들을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삶 앞에서 이렇게 진실했던 적이 있었던가. 바다 저편에 눈부시게 빛나는 협재해수욕장의 해변에 울긋불긋한 사람들의 물결이 출렁거린다.


글 최경애 (수필가) / 사진 김선규 (생명다큐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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